1970년대부터 일본군‘위안부’ 증언 채집… 구순 바라보는 나이에도 연구 열정 대단해
“일본군위안부 징집은 성폭력을 면밀히 연구하고 제도화한 만행…
일제강점기 민족의 큰 짐과 고난 짊어진 소녀들의 희생으로 이어져”

 

한국과 일본 학자들의 정신대 문제 연구서로 가득 찬 서재에 앉은 윤정옥 박사. 구순을 목전에 둔 지금도 그의 연구 열정은 여전하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국과 일본 학자들의 정신대 문제 연구서로 가득 찬 서재에 앉은 윤정옥 박사. 구순을 목전에 둔 지금도 그의 연구 열정은 여전하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그 수많은 소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광복 후 한참 후에도 돌아오기는커녕 소식 하나 없을까.”

그의 평생을 통한 정신대(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추적은 18세 때 느낀 이 강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구순이 가까운 지금까지 일관되게 밟아온 그의 여정을 듣다보니 그와 정신대 문제는 숙명의 끈으로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대에 끌려갈 뻔했던 위기를 모면하고 살아남은 자의 역사적 책무의식은 거의 강박관념처럼 그를 지배해왔다.

2005년 ‘호주제 폐지’라는 가부장 사회의 큰 걸림돌을 뛰어넘은 한국의 여성운동사에 남은 거의 유일한 미해결 과제 정신대 문제. 과거에도, 현재에도, 어쩌면 미래에도 자행될 ‘전쟁 중 성폭력’이란 치명적 범죄를 해결할 돌파구가 될, 과거사적이면서도 미래 비전적인 여성문제다.

여성신문 창간 25주년을 맞아 이 문제의 촉발자이자 전 세계 이슈화에 도화선을 마련한 윤정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초대 공동대표를 만났다. 그는 2010년 번잡한 서울을 떠나 호반의 도시 춘천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 평생을 전념해온 정신대 문제에 대한 회상과 기록, 저술에 전념하고 있다.

 

정신대에 끌려갈 뻔한 악몽

위안부에 대한 평생 관심으로 이어져

“2000년 12월 (일본군 성노예전범) 국제법정에서 히로히토 전 일왕과 일본 정부에 유죄를 선고한 것이 정신대 문제 해결의 결정적 계기가 될 줄 알았어. 할머니들도 나도 이제는 일본 정부가 정심으로 사죄를 하겠구나, 희망을 가졌지. 그래서 그 이듬해 대표직을 내려놓고 남은 과제는 후배들의 손에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지. 사실 난 (어떤 면에선) 배상도 원치 않아. 이젠 일본 스스로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닫고 진정으로 사죄해서 할머니들의 존엄성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난 그거 하나야.”

30여 년간을 대학(이화여대) 강단에 섰던 영문학자지만 극적인 삶의 전환기는 오히려 1990년 65세 정년퇴임과 함께 찾아왔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한국여성민우회 등 15개 여성단체와 연대해 정대협을 조직, 초대 공동대표로 세상을 피해 숨어 있던 정신대 출신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 설득하고 그들의 증언을 채집, 그 실상을 국제무대에 알리면서 그의 삶에서 가장 치열했던 10년을 보냈다.

“1940년대 전쟁 막바지에 결혼 안 한 젊은 여성, 직업이 없는 여성 등이 우선 정신대로 끌려갔어. 나도 당시 이화여전에 입학했었는데, 어느 날 학생들을 학교 강당에 불러 모으더니 정신대 자원서를 쓰라는 거야. 그래서 그 다음 날로 학교 안 나온 학생들이 많아. 내가 당시 정신대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학도병과 결혼한다는 자퇴 이유가 거짓말인 줄 짐작하면서도 이를 받아준 일본인 교무처장과, 당시 경성제국대 물리학과에 조수 자리를 내준 젊은 일본인 교수 덕분이지.

이런 경험 때문이지 광복 후 학도병으로 강제 연행됐던 젊은 남자들이 서울역으로 속속 쏟아져 들어오자 난 거의 매일 오후 서울역에 찾아가 ‘정신대로 끌려갔던 소녀들은 어떻게 됐어요?’라며 귀환하는 남자들에게 물었지만 대부분 대답을 회피했지. 그렇게 열흘쯤 지나서인가 40대 초반 중간 키의 남자에게 또 그 질문을 했더니 ‘걔네들은 위안부야!’ 하고 가버리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위안부’란 말을 처음 알았지. 후에 미국 유학도 가고 대학 강단에도 섰지만 이 ‘위안부’란 말은 늘 내 머릿속에 있었어.

그는 위안부 문제야말로 가부장적 풍토와 위계질서 가운데 자행된 만행이라 생각한다. 동네 사정을 훤히 아는 면장이나 면서기는 딸을 안 내놓는 집에 때론 쌀 배급표를 안 주겠다거나 아들을 강제 징용하겠다는 협박을 일삼았다는 것. 더 비극적인 것은 오빠를 대신해 여동생이 정신대에 자원한 집도 후엔 아들까지 학도병으로 내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정신대 연구를 해온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다른 전쟁 중 성폭력 범죄와 확연히 구별되게 죄질이 아주 나쁘다. 성폭력을 면밀히 연구해 이를 의도적으로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전문가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주오대)나 내가 홋카이도, 삿포로 등 일본 방문 시에 고서점 등을 뒤져 찾아낸 자료에 의하면 이건 정부가 주도면밀하게 개입된 치밀한 범죄야. 일례로 1941년 일본 관동군의 한 프로젝트로 2만 명의 조선인 위안부를 모집하라는 지시가 조선총독부에 내려졌고, 2년 정도의 기한을 줬는데, 총독부에서 수개월의 단시일에 무려 8000명의 위안부를 모집해 중국 동부 만주 쪽으로 보냈다는 기록도 있어. 위안부 징집은 행정부와 경찰이 전면에 나서서 전개하고 이를 민간업자와 연결한, 관 알선에 가까웠던 형태가 아닐까, 짐작하지….

더 나쁜 것은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처럼 위안부 대상을 면밀히 연구했다는 거야. 건강한 여자가 하루에 몇 명의 남자를 상대할 수 있느냐, 그리고 어떻게 하면 군인들이 성병에 최대한 안 걸리느냐, 이런 것을 면밀하게 고려했지. 당시 흩어져 있던 인쇄물을 모아 유추해보니 한 여성이 하루에 상대할 수 있는 적정 군인의 수를 27명으로 정하고, 성병을 최대한 예방하기 위해 (성매매를 하는) 직업여성을 피하고, 남자를 모르는 순결한 처녀, 미혼 여성 등을 주로 강제동원하게 됐어.

 

“여성 한 명이 하루에 감당할 수 있는 남성이 27명?”

… 731부대처럼 여성 몸 실험

일본 오키나와의 한 사탕수수밭 오두막에서 기거하던 배봉기(자신이 일본군위안부였음을 세계 최초로 증언했고, 1991년 77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할머니를 무턱대고 찾아간 것이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을 탐사하기 시작한 그의 여정의 첫 단추다. 이후 할머니들을 찾아 사할린, 중국, 대만은 물론 태국, 미얀마, 파푸아뉴기니 등 할머니들의 소식이 들려오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1992년엔 중국 동북부 지방을 탐사, 일본군 출신과 현지인들의 증언을 듣고 군 위안소 건물을 확인하는 한편, 그곳에서 살다가 숨진 위안부들의 묘지를 찾아내 첫 한·일 합동 위령제를 열기도 했다. 1993년 11월 평양 방문에선 정신대 문제에 대한 남북한 공조 체제를 이루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국내외 무대에서의 그의 활약은 일본 정부엔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정대협 대표를 맡으면서 한 첫 작업은 당시 김영삼정부에 일본에 항의하고 공식 사죄를 받아낼 것을, 일본 정부엔 공식 사죄와 함께 배상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로부터는 “노력해보겠다”는 형식적 답변을, 일본 정부로부터는 일본군위안부 관련 얄팍한 자료집을 건네받은 게 다였지만. 그러나 그의 끈질긴 노력은 1993년 8월에 나온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를 통해 위안소는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됐고, 일본군위안부 동원 역시 여성들의 의사에 반한 모집으로 본인들의 명예와 존엄성을 훼손했다는 일부 시인을 이끌어낸 것과 결코 무관치 않다.

199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여성토론회에 이우정·이효재 선생과 함께 공동대표로 참가한 그는 김일성 주석을 집무실에서 독대했다. 그의 느낌으론 “그 양반도 자기를 떠받치지 않고 마음 놓고 얘기하는 게 처음이라 그런지” 당초 예정 시간 20분에서 또 20분을 연장해 남한 대표단의 얘기를 경청했다. 그는 “남북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였을 때 조선 여자로 (정신대로) 끌려갔으니 남북 불문한 우리의 문제다. 그러니 일본 정부에 북한도 압력을 넣어서 끌려갔던 여자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역설했다.

“김 주석은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이어서 허물 없이 얘기했어. 예정에도 없던 오찬에 초대해 한 테이블에 앉게 됐는데 김 주석이 고민이 있다고 하는 게 아니겠어. 그게 뭐냐고 하니 관광수입을 위해 금강산에 케이블카를 놓을까 말까 한다는 거였어. 그래서 대번에 내가 그랬지. ‘(케이블카를) 놓으면 안 돼요, 그건 자연 파괴예요’라고. 후에 북한 대표단 여성들이 ‘우린 수령님을 감히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데, 지가 뭔데 감히 수령님께 안 된다 하느냐’며 나를 피하는 게 아니겠어.(웃음)”

그의 부친은 진보적인 목사였다. 8남매 다섯 딸 중 셋째 딸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 동안 자정을 넘긴 시각에 시도 때도 없이 일본 헌병이 들이닥쳤던 사찰에 대한 끔찍한 경험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힘든 시절, 그 나름 어려움도 겪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신대 할머니들을 만나기 전까지의 삶은 “껍질뿐이었다”고 감연히 말한다.

 

김일성 주석에게 “정신대는 남북 모두의 문제…

북한도 일본에 압력 넣어야” 역설

“일부러 세어보진 않았지만 이제까지 만난 할머니들이 백 명이 훨씬 넘어. 19세기 영국문학, 특히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위대한 유산’의 찰스 디킨스를 좋아했고, 소설 속에 정치, 경제,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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