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감독은 아무렇지 않게 몸을 더듬었다. ‘넌 가슴이 너무 커서 스피드가 느리다’는 말도 했다. 한번은 회식 자리에 불려 나갔다. 접대부가 있는 술집이었다.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그래도 참았다. 거부하면 경기에 출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경기 출전 권한은 전적으로 감독에게 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개인종목 국가대표 상비군을 지낸 정희영(가명·37)씨가 경험한 떠올리기 싫은 ‘성추행’의 기억이다. 정씨는 그때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도 한편으론 잘 참았다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폐쇄적인 구조상 감독에게 ‘찍히면’ 평생의 ‘주홍글씨’가 돼 해당 종목 분야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다.
스포츠 종목에서 남녀 차별은 이제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도자 문화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다. 특히 한국이 그렇다. 스포츠의 특성상 지도자는 출전 시간과 진학, 취업을 통제하는 제왕적 절대 권위자다.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그들만의 훈육’이 허용된다. 여성 선수에 대한 배려는 찾기 힘들다. 폭력도 묵인되고, 때로는 성추행도 지도를 위한 자연스러운 스킨십일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피해자의 신고는 생각할 수도 없다. 선수생명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포츠계의 성폭력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을 수립하고 발표했다. 2008년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인적자원부, 대한체육회가 머리를 맞대고 발표한 스포츠 성폭력 근절대책은 △성폭력 지도자 영구제명 조치 △선수 접촉·면담 가이드라인 수립 △체육계 통합 성폭력 신고센터 설치(문화체육관광부-대한체육회) △‘여성 지도자 할당제’ 도입 △상시 합숙훈련 개선 △체육지도자 자격 강화 △체육지도자 아카데미 운영 등이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났다. 하지만 체육계의 성폭력 문제는 여전하다.
지난 5월 태릉선수촌에서 훈련을 받던 여자역도 대표팀 A(18) 선수가 오승우(55) 역도대표팀 총감독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며 대한역도연맹에 경위서를 제출했다. 국가대표의 요람인 태릉선수촌에서 발생한 일이다. 대한역도연맹은 지난 8일 오 감독을 영구제명했다.
중·고등학교, 대학교 체육 현장에서 성폭력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다시 묻힌다. 대한체육회가 2010년 국정감사 때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0년(1~10월) 신고된 성폭력 사건은 75건이었지만, 이 중 관계 기관에서 가해자를 징계한 사건은 2건에 불과했다. 선수들이 용기를 내어 신고를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관계 부처와 해당 구단, 연맹의 미온적 태도가 범죄를 키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사건의 진실 규명과 재발 방지에 앞장서야 하지만 임시방편만 내놓을 뿐 장기적 대책이나 예방책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백미순 소장은 “스포츠계 성폭력 사건은 심각한 수준이다. 성폭력 피해 당사자들은 큰 권력을 가진 지도자들 앞에서 말 한마디 하기 힘들다”며 “지도자들의 인식 전환이 급선무다. 예방교육을 진행하고, 문제가 됐을 경우 엄격한 처벌을 해야 한다. 연맹과 협회가 안일하게 대처하기 때문에 문제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 최초 태릉선수촌장을 지낸 이에리사(59·새누리당) 의원은 “체육 현장의 성폭력 문제는 지도자의 무지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남성 지도자들이 젠더감수성을 가져야 한다”며 “이를 위해 체계적인 교육과 예산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의원은 “지도자들의 고충도 있다. 스포츠 종목의 특성상 스킨십은 꼭 필요한 부분이다. 지도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될 수 있는 불씨나,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도자뿐 아니라 선수, 학부모들도 성추행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해외 스포츠 성폭력 예방책을 적극 도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김미숙 체육과학연구원 정책개발연구원은 ‘독일 스포츠 성폭력 방지책에 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주 스포츠연맹은 체육지도자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성별융합 학습 교육을 하고, 여성청소년부 후원으로 지도자 특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1998년 이래 이 과정을 이수한 150명의 지도자들은 실제 스포츠 성폭력에 대한 전문 상담원이 돼 어린 여성 선수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또 감독 및 연맹 직원 채용 시 전과 기록이나 범죄기록을 확인해 인사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고등학교체육연맹(NFHS)의 ‘학교운동부 성폭력 예방 십계명’도 눈여겨볼 만하다. NFHS는 십계명을 만들어 지도자와 학생 간 서약서를 만들어 운동부 내 성폭력 근절에 힘을 쏟고 있다. NFHS 10계명은 △성적 농담 금지 △성적인 영상물 제공 금지 △과도한 사적 대화 금지 △과도한 사적 편지·선물 금지 △신체나 외모에 대한 언급 금지 △신체 접촉 최소화 △단둘만의 차량 동승 금지 △학교 밖에서 일대일 만남 금지 △단체여행 시 보호자 동행 △사적인 데이트 절대 금지다.
NFHS 십계명을 2011년 논문 ‘스포츠 성폭력의 실태, 규제와 대책’에 소개한 윤상민 원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체육계 성폭력은 폐쇄적인 조직 특성상 매우 은밀하게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 대상도 지도자와 제자(학생) 간, 선후배 간, 동료 간 등 복잡한 구조 속에서 발생한다”며 “성폭력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선수임명권’ 등 감독에게 집중돼 있는 절대적 권력을 분산시켜야 하며, 시민단체나 상급 기관이 수시로 모니터링을 하여 체육계 성폭력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