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통 알아주는 이들 많으니 행복해요”
“우리 고통 알아주는 이들 많으니 행복해요”
  • 이은경 / 여성신문 편집위원
  • 승인 2013.08.07 12:10
  • 수정 2013-08-09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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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초 ‘커밍아웃’ 후 여성인권운동가로…
전쟁 중 성폭력 피해자 돕는 ‘나비기금’ 주창

 

“미국도 갈 때마다 반응이 많이 달라지는 걸 느껴. 이번에도 가니까 교민들도, 미국 사람들도 참 많이 환영하더라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일본에서는 배상할 것 다 했고, 사죄할 것 다 했다고 알고 있더라고. 그래서 ‘미친 자식들’이라고 그랬지. 일본이 사죄할 때까지 소녀상은 자꾸 번져나갈 거야. 다녀보니 워싱턴에서도, 시카고에서도 소녀상을 세우고 싶어 해. 소녀상 세워놓고 돌아서니 마치 내 친동생을 두고 온 기분이야. 잘 지켜야지.”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것과 같은 ‘평화의 소녀상’이 해외에선 처음으로 지난 7월 30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인근 글렌데일 시립 중앙도서관 앞 공원에 세워졌다. 소녀상 제막식에 맞춰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대표와 함께 방미, 로스앤젤레스·시카고·워싱턴 등지를 돌며 일본군‘위안부’ 증언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김복동(88·사진) 할머니를 서대문구 충정로 정대협 쉼터에서 만났다. 올해는 특히 광복절 하루 전날인 8월 14일 제1087차 수요시위에서 처음으로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첫 증언자 ‘김학순의 날’)이 선포돼 전 세계 연대 시위가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이에 앞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 1억인 서명운동도 활발히 진행 중이어서 정신대 운동이 정점을 향해 돌진하는 느낌이다.

 

글렌데일시 소녀상, 마치 친동생 두고 온 것 같아

김복동 할머니는 정신대 운동에서 기념비적 존재다.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에 정신대 할머니로선 처음으로 파견돼 증언한 것을 비롯해 미국, 일본, 유럽 등 여러 곳을 정신없이 다니며 생생한 증언을 해왔다. 그러던 중 지난해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쉼터에서 함께 기거하는 길원옥(86) 할머니와 함께 의미 있는 선언을 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일본의 공식 사죄와 함께 이뤄질 법적 배상금 전액을 전 세계 전쟁 중 성폭력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각종 폭력에 고통 받는 여성들을 위해 기부하는 ‘나비기금’을 발족시킨 것. 이로써 정신대 운동은 과거의 상흔을 딛고 미래를 향해 가는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됐고, 동시에 피해자 생존 역사의 새로운 장을 쓰게 됐다. 할머니 개인으로서도 트라우마의 완전한 극복을 선언한 셈이다. 그의 이름 앞에 수식어로 붙는 ‘여성인권운동가’란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정작 자신은 “‘여성인권운동가’라 그리 불러주니 그렇지 자격이나 있을까” 하고 수줍어한다.

“다니다보니까 우리도 우리지만 우리보다 더 형편이 어려운 여자들도 있더라고. 이왕 운동하고 다닐 바에는 저런 사람들도 도울 수 없을까 고심했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뜻을 같이하는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가능하지 않겠어? 그렇게 시작했더니 반응들이 참 좋아. 베트남 여성들의 경우, 전쟁 때 한국군한테 성폭행 당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이 많아.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지른 일인데... 정부가 앞장서서 도와야 하는데…. 지금도 매달 베트남으로 나비기금이 훨훨 날아가고 있어.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지.”

할머니는 경남 양산에서 딸만 여섯인 딸 부잣집 넷째 딸로 태어났다. 정신대에 끌려갈까봐 위로 세 언니를 어머니가 모두 서둘러 시집보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만 14세가 된 넷째 딸은 “군복 공장에 취직시키겠다”는 반 협박 속에 강제로 끌려갔다. 일제 막바지인 1941년이었다. 그리고 그 8년 후인 22세 때 고향으로 돌아왔다. 딸이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강제 징용 당했다가 돌아온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는 귀향한 딸을 결혼시키려 백방으로 애쓰다가 할머니의 고백을 듣고서야 딸의 혼사를 포기했다. 이후 할머니는 6·25가 나자 부산으로 피란, 다대포에서 국밥집, 국수집 등 음식 장사를 하며 열심히 살았고 장사도 그런 대로 잘 됐다. 1992년 1월 17일 자신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정부에 자진 신고하기 전까지는. 왜 할머니는 생계가 절실하지도 않았는데 어머니만 알고 있던 수치스러운 과거사를 가족에게 상의 한마디 하지 않고 공개해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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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커밍아웃’ 안 했을 것

“하루는 TV를 보니 정신대 할머니들 신고하라는 전화번호가 나오더라. 많이 망설였는데, 일본에서 말하길 자기네들이 한 짓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돈벌이를 하러 갔다고 해. 그 사실을 덮으려는 거짓말에 부아가 나서, 내가 나가서 말해야겠다 결심했지. 젊었을 때는 장사가 잘 돼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그런 것 생각할 여지도 없었고. 사실 신고할 용기를 낸 것은 절대 비밀을 보장해준다는 말 때문에 그랬어. 그런데 신고하고 나니 신문 방송에 나와 자연적으로 주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됐어. 난 억울하게 끌려가 희생됐지만 한국 근성이 어디 그래? 본래 여자는 그런 짓 해선 안 된다 하지. 요조숙녀로 평생 살려고 마음먹었는데, 말년에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수모를 당하게 됐지…. 신고 후 제일 괴로웠던 게 뭔지 알아?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거야. 그때만 해도 (60대니) 나이가 젊어 내가 증언하면 일본이 빨리 해결해줄 줄 알고 그것만 기다렸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 그때 알았더라면 아예 신고 자체를 안 했을 거야.”

 

건강관리 운동은 ‘수요시위’ 취미도 ‘수요시위’

이후 할머니의 삶은 180도로 급변했다. 친지들은 멀어지고, 대신 그 공백은 매주 수요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의 시위로 메워졌다. 오죽하면 “건강관리 운동은 매주 수요시위 하는 것, 취미도 수요시위”라고 할까. 이러다 보니 체력이 견뎌낼 수 없어 부산 음식점을 정리한 후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서 7년간 지내기도 했다. 다시 부산에 내려가 몸을 추스른 후 서울 정대협 쉼터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 3년 전. 건강에 큰 문제는 없지만 두 눈이 거의 실명 위기라 사람 윤곽만 어렴풋이 보여 치료에 애태우고 있는 것이 요즘 당면한 걱정거리다. 

할머니는 증언 순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나라로 주저치 않고 일본을 꼽는다. 극우파에게 테러 당할까봐 경찰이 화장실까지 호위하는 불편함도 있었지만 일본에 갈 때마다 ‘이번엔 혹시 (우리를 성폭행했던 것을) 참회하는 군인이 나타나 그때 진실을 증언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차마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전쟁 막바지에 위안부를 동원한 사실이 알려질까봐 일본군이 육군병원에 위안부들을 간호원으로 위장시켜 근무하게 했고, 그래서 위안부들이 환자를 돌보는 사진도 있는데 일본은 아직까지도 그런 일이 없다 하니 답답할 따름이란다.

“일본에 숱하게 다녔는데, 우리가 하도 전쟁범죄자 처벌하라 하니 처음엔 우리를 옹호해주던 사람들도 뒤로 물러섰어. 자기 할아버지, 아버지가 전쟁범죄자인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요즘엔 또 확 달라졌어. 증언 집회에 수백 명씩 몰려오고, 정말 진심으로 사죄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대해줘. 그런데 이런 문제는 국민끼리가 아닌 정부끼리 풀어야 할 문제 아니야? 새 정부가 들어섰는데도 우리 편을 잘 안 들어주는 것 같아 정말 화가 나. 일본과의 배상 문제가 틀어진 게 언제부터야?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아니야? 그럼, 그 딸이 대통령이 됐으니 아버지가 잘못한 것 책임지고 앞장서서 바로잡아야지. 하는 것 두고 보려 해.”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이젠 가족이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할머니는 대뜸 “누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겠어? 지금도 이젠 좀 그만두라고 난리야. 나이도 많은데다가 해결도 안 되니 자꾸 여기저기 얼굴 비추는 것 싫다고 해”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지난 5월 일본 순회 강연에서 시민들의 박수를 이끌어낸 에피소드를 회상하면 힘이 난다. 당시 할머니는 역사 망언을 되풀이하는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극우 정당인 일본유신회 공동대표)을 향해 “(시장) 옷 벗고 집안에서 살림이나 하라”고, 아베 총리에겐 “과거의 잘못을 하나도 뉘우치지 못하고 있으니 총리 자격 없다, 정부에 나와 일할 자격 없다”고 일갈했다.

“전엔 우리가 데모하러 나가면 국민들이 비웃었는데, 요즘은 확실히 달라. 강연할 때마다 마음 아파하며 감동들도 많이 해. 외국에 나가도 예전엔 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우리 교민들이 정말 반가워하고 뭐라도 하나 더 대접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고맙지. 이젠 우리 생각해주고, 우리 고통 알아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하니 정말이지 행복해.”

인터뷰를 마치면서 할머니는 “(일본의 만행을) 밝히려 노력해왔고, 이왕 칼을 뺐으니 다시 꽂을 수 있겠느냐”며 “끝을 보고 남은 인생 좀 편안히 살다 가고 싶은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덧붙였다.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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