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영혼을 정화하는 영화로 승부하고파”
‘별들의 고향’ 비롯해 70∼80년대 한국영화 흥행사 다시 써
내년 감독 데뷔 40주년에 종교영화 ‘시선’ 준비 중
‘어둠의 자식들’ 등 80년대부터 소외계층과 종교문제에 몰두
“복귀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다시 현장 감독으로 데뷔하는 듯하다. 어떤 면에선 그 전 작품들에서 보여져 온 소비 지향적이고 감각적인 작품 세계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돈이 목적인 인생의 반대는 무엇일까라는 고민 속에서 인간이 처한 현실을 넘어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이상적인 삶이란 결론을 얻었다. 이미 80년대에 ‘어둠의 자식들’ ‘낮은 데로 임하소서’ 등 소외계층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영화들의 마지막 장면에 찬송가를 삽입하곤 했다. 그때는 기독교적 영성이 그리 강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그렇게 했다. 그런데 후에 그 마지막 장면들이 여전히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서 마치 ‘영화는 네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해 만드는 것’이란 신의 메시지를 받은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1980년대 초반 연예인 교회를 시무하던 고 하용조 목사를 통해 지금의 신앙을 가지게 됐고, 작품관이 변하는 계기를 맞았다. 누가 본 것도 아닌데 성경 공부를 하는 중에 지갑 속에 부적이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부적을 사람들 앞에서 태워버린다거나, 그에게 대종상 감독상을 안겨준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이 명보극장에서 개봉했을 때 밤에 몰래 극장에 잠입, 흥행을 기원하며 스크린 뒤에 붙여 놓았던 부적을 다시 떼는 등의 신앙적 행위도 뒤따랐다. 도시빈민 선교를 하던 고 허병선 목사는 ‘바람 불어 좋은 날’을 관람한 후 “목회자가 하는 역할을 영화가 더 폭넓게 할 수 있으니 계속 좋은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는데,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바로 “돈 벌어주는 영화”에 집착했던 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부끄럽게 여기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시선’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의 설명을 들은 기자의 느낌으로는 차이와 포용성에 대한 깊은 고민거리를 던져준 것이 가장 큰 미덕이지 않을까 싶다.
“순교 이야기인데, 사실은 배교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어떤 면에서 배교는 또 하나의 순교라는 역설적 생각도 들었다. 원작의 시대적 배경을 현대로 옮겨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 선교활동을 갔다가 피랍된 샘물교회 사건으로 각색했다. 목사가 배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는 절망의 순간, 무엇을 택할 것인가. 후에 사건 당사자들이 펴낸 수기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이슬람에 대한 반감이 전혀 없고, 오히려 후엔 자신들을 억류했던 게릴라들의 가족들과 교감과 사랑을 나누는 단계까지 발전했기 때문이다. 100여 년 전 한국에 온 언더우드 선교사 같은 이들은 ‘지금 한국 땅은 절망적’이라고 본국에 편지를 썼는데, 그때의 상황과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이 상당히 비슷하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얻은 결론은 ‘하나님은 이슬람도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거장에게도 복귀 과정은 험난했다. 차기작을 위해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의 마스터 영화제작 지원에 응모했는데 심사위원회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음에도 후에 사업 대상자 선정에서 제외됐다. 결과를 납득할 수 없었던 그는 서울행정법원에 심사결정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낸 끝에 2011년 7월 영진위의 재량권 남용을 인정받아 승소 판결을 얻어냈다. 그가 가장 분노한 것은 자신을 제외한 데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법원이 9인의 심사위원들에게 그를 제외시킨 이유를 물었지만 “이유 없음” “연출자가 노령이라 신뢰 못 하겠다”는 등의 막연한 답변서를 제출했다.
복식사를 바꾼 ‘어우동’, 실험영화의 대중화 ‘바보선언’ 등 개척자적 행보
“‘별들의 고향’의 ‘경아’(안인숙 역)는 근대 산업화 과도기 과정에서 파생된 새로운 여성상인데, 이를 새로운 감각으로 호소했기에 외국 영화를 보던 관객들의 시선을 한국 영화 쪽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특히 이 시대 관객들은 일제, 광복, 6·25를 거친 흘러간 옛 세대와 결별하고,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과 팝송 문화를 접한 그 나름 신세대였기에 이 영화의 흥행 코드와 맞아떨어졌다. 사극영화 ‘어우동’(1985)은 감히 지금의 한국 영화, 드라마의 복식 흐름을 바꾸어 놓은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 신상옥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일할 때 주로 역사극을 찍었는데(조감독으로서 그의 이름이 정식으로 드러난 것은 1969년작 ‘이조 여인 잔혹사’다), 당시만 해도 제작비 문제 때문에 엑스트라 의상을 대량으로 미리 준비해 여러 영화에 돌려 재활용했다. 의상들이 모두 구한말 스타일로 천편일률적이라 이런 의상 문제를 가장 바꾸고 싶었다. ‘어우동’을 만들면서 석주선 단국대 교수(민속학자) 박물관을 둘러보고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옷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영화에서 대표적으로 차용해 히트시킨 것이 바로 주인공이 썼던 기생모자 ‘전모’였다. 이토록 매력적인 모자가 조선시대에 있었다니… 결국 전모를 통해 한국 영화사의 전통의상 복식이 조선 중엽으로 앞당겨졌다고나 할까(웃음). 이렇게 엑스트라 옷들부터 바뀌기 시작하니 사극 흐름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마침 경기도 좋아져 제작자들이 의상 비용에 인색하지 않게 됐다. 이렇게 해서 2000년대쯤 되니 비로소 내가 그리던 그런 복식 스타일이 극에 생기기 시작하더라.”
‘바보선언’(1984)을 통해 실험영화의 대중성을 시험했고, ‘공포의 외인구단’(1986)은 언더그라운드 비주류 문화였던 만화를 주류 문화에 진입시킨 계기가 됐다. 그렇다면 영화감독 이장호에게 있어 ‘여성’은 어떤 의미로 표출됐을까.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여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페미니즘에 대해 깊이 공감하지 못한 시절도 물론 있었다. 여성들이 너무 반여성적인 것을 주장하면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여성에게서 가장 감동받는 부분은 강하다는 것이고, 이는 완력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내하고 견디는 힘 면에서 그렇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모성적 면이라고 생각하고, 여성들이 이 모성적 장점을 잘 활용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는 ‘여성’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문제라는 것이다. 결국 여성도 인간이지 않은가.”
말은 그렇지만 그는 3년 전쯤 한 신학대 세미나에서 500여 명의 신학자들을 청중으로 하고 ‘사고’를 쳤다. 여성 성기를 소재로 한 연극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