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사랑한 연극, 선물로 드려요”

갓 결혼한 아들이 신부의 옛 애인과 격투를 벌이다 죽은 후 비통함에 잠긴 어머니 역을 맡은 박정자. 그의 비장한 읊조림이 장내에 빽빽이 들어찬 관객들을 압도한다.

6월 30일 오후 3시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대표작가전 ‘이병복, 3막 3장’의 폐막을 장식하는 피날레 퍼포먼스다. 스페인 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원작을 연출가 김정옥이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극단 자유의 대표작 ‘피의 결혼’ 중 한 장면을 15분간 선보였다. 이 특별한 행사는 5월 23일 시작된 전시의 주인공 이병복(86) 무대미술가를 향한 연극인들의 헌정 공연적 성격을 띤다. 이씨는 40여 년간 극단자유의 대표로 연극인들과 함께 호흡하며 한지를 주요 소재로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무대미술과 의상을 개척해온 독보적인 선구자다.

그의 손길을 거쳐 간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이번 ‘피의 결혼’은 특히 그가 애착을 갖는 작품이다. 퍼포먼스는 무대배경부터 의상에 이르기까지 그가 혼신을 다해 꾸민 장치 속에 치러졌다. 극은 3막2장의 구조로 돼 있지만, 80대 중반을 넘겨서도 그의 예술 여정은 계속되리라는 낙관적 믿음에서 지어진 전시회 제목 ‘3막3장’ 역시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작가는 아직도 서울 장충동과 경기도 남양주 작업실을 오가며 창작에 열중하고 있다. 

전시는 그가 연출가 김정옥과 함께 1966년 극단자유를 창단, ‘따라지의 향연’(이 작품은 총 5회에 걸쳐 무대에 올려졌고, 마지막 공연은 극단자유의 40주년 기념작이자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작품이 됐다)을 초연하며 연극계의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한 족적을 따라 마치 관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으로 구성됐다. 그중 6·25전쟁 중 부산 피란지에서 만나 결혼한 서양화가 권옥연(1923~2011)과의 평생에 걸친 예술적 파트너십의 흔적은 특히 인상 깊다. 1969년 그는 남편과 힘을 합해 서울 명동에 카페 떼아뜨르(불어로 ‘연극’)를 설립, 극단자유의 전용 무대로 활용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소통하고 작업하며 관객과 교감을 나누었다.

당시 간판을 비롯해 로고, 리플릿, 초대장에 이르기까지 남편 권 화백의 손길을 거쳐 다듬어졌다. 전시장 가운데 자리잡은 그 옛날 연습 장면을 담은 대형 흑백사진 밑에는 ‘잊을 수 없는, 먼저 간 나의 벗들에게’란 타이틀 아래 “유치진, 오영진, 김영태, 이윤영, 추송웅, 함현진, 박영희…” 등 연극인들의 이름이 나열돼 평생 연극과 동고동락해온 그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 1950년대 후반 파리 유학 시절, 단순하지만 발랄한 스케치와 함께 드러낸 낭만적 감성, 주머니 사정으로 실습 재료 구입 걱정을 하는 소박한 자연인의 모습도 지금 보면 흥미롭다.

‘이병복, 3막3장’의 막은 내렸지만 “자연을 정복 혹은 지배하는 현재적·과학적 사고와 스케일은 애당초 태어날 때부터 갖지 못했고 또 가져보려고 감히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저 자연의 품 안에서 진솔한 삶을 동경하면서 내가 해보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내 몫의 일을 찾을 뿐”이라는 그의 고백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전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