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영숙 선생님을 추모하며

지난 5월 17일 금요일, 나는 마감일을 하루 넘긴 원고를 쓰기 위해 새벽 4시30분 경, 서둘러 책상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자료를 뒤적이고 글쓰기를 막 시작할 즈음, 전화에 문자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그 때가 5시10분경. “박영숙 선생님께서 운명하셨습니다”라는 짤막한 문자가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했다.

나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새벽 공기를 가르며 국립암센터로 향했다.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병원이 그렇게 멀게 느껴졌다. 병실에 도착하니 이해동 목사님이 예배를 집례하고 계셨다. 가족들의 절절한 기원 속에 박영숙 선생님은 고이 잠들어 계셨다. 근심걱정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모습으로. 예배가 끝나자 인사드리라며 이종옥 선생님이 자리를 내주셨다. 마주한 상황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왔느냐며 손을 잡아주실 것만 같았다. 따뜻한 인사를 드리고 나는 선생님 이마에 마지막 입맞춤을 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선생님을 보살펴온 강경희 선생, 박옥희 선생도 달려와 선생님을 뵈었다. 묵묵히 임종을 지켜본 명진숙 선생과 함께 그날 새벽 우리는 그렇게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꼭 일주일 전 이계경 선생과 자택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선생님은 비교적 여유를 보이셨다. 우리의 이런 저런 질문에 농담도 하시고 당신의 의견도 피력하셨다. 젊은날 안병무 박사께 마음 끌리셨던 이야기도 살포시 나누시고 새 지도부를 맞은 민주당에 대해서도 짤막한 코멘트를 날리셨다. “민주당은 앞으로 멜팅 팟(melting pot, 용광로)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짤막한 논평을 들을 때면 그분이 힘든 병과 사투를 벌이는 환자라는 사실마저 잠시 잊게 만들었다. 의미 있는 정보를 드리면 그분은 어딘가에 적어놓고 싶어 하셨다. 그날 나는 간이 식탁에 놓인 냅킨에 ‘한국인만 모르는 세 가지’를 메모해두고 나왔다.

82년의 한국역사가 출렁이는 선생님의 생애를 마주하면 할수록 그 분이 축적해온 신념과 실천과 지혜는 매번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우연하게 선생님의 말년 활동에 함께 하게 되면서 주변의 몇 사람과 함께 나는 그 분의 생각과 실천과 지혜를 날것으로 만져볼 수 있었다. 특권이었다.

2011년경 곤두박질치는 한국 정치를 지켜보던 선생님은 우리에게 버거운 주문을 하셨다. 정치적 전환기에 여성들이 반드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그분의 주문은 집요했고 강력했다. 피하고 싶어 미적대고 게으름을 보이던 후배들을 불러내 손수 지극정성으로 마련한 점심을 먹여가면서 팔순을 바라보시던 선생님은 결국 ‘살림정치’라는 운동을 만들어내셨다. 포기를 설득하는 후배들에게 동의했다가도 “그래도 이일은 해야 되는 일인데….”라며 혼자 말을 흘리시던 선생님은 결국 좌절감에 빠진 후배들을 묶어내고 말았다. 이렇게 정치전환기에 여성들의 정치활동공간을 마련하고 남윤인순의원 등 후배들의 의회 진출에 적지 않은 힘을 보태셨다. 2012년 총선이 끝나자 선생님은 의회 진출한 여성들과 이를 지원한 후배들에게 축하 잔치를 베풀었다. 하얗게 밤을 새우며 손수 마련하신 잔치상을 받으며 그날 여성들은 얼마나 행복해 했던지!

이 와중에 선생님은 ‘두런두런’이란 단체도 만드셨다. 후배 여성들이 제3세계 여성 지원에 나서도록 새 길을 내신 것. 전란 후 전 세계의 도움을 받으며 눈부신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한국이 이제는 후진국을 도울 때라는 것이 선생님의 신념이었다. “내게 남은 시간이 별로 많지 않거든”이란 말씀을 가끔 하시던 선생님은 어느 날 네팔에 다녀오겠다고 하셨다. 네팔을 여행하며 현지 여성들의 처지를 보고 만지고 오신 선생님은 또다른 영역의 후배여성들을 묶어 ‘두런두런’이란 단체를 단숨에 조직해 내셨다. 세계의 도움을 받아 성장한 한국여성들이 이제는 제3세계 여성들 지원에 나서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두런두런 조직이 완성되던 날, 상기된 모습의 선생님은 슬그머니 브로슈어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좋았어” 그리고 아무 말씀도 없었다. 그분은 말년에 그렇게 조용하게 그의 신념을 하나씩 실천에 옮겨 가며 후배들에게 새 의제를 안겨주고 새 길을 내고 계셨다.

그분이 이루고 싶었던 일은 더 있었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여성운동에 기꺼이 투신한 여성운동 후배들(그분은 이들을 ‘여성공익활동가’, 또는 ‘거룩한 바보들’이라고 불렀다)이 충분히 휴식하고 재충전해 활력을 얻고 다시 일터로 갈 수 있도록 여성 활동가들의 휴식‧재교육 공간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울 수 있는 사회적 기업도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선생님이 마지막에 조금씩 주변 활동을 정리한 했던 것은 그가 품었던 이런 구상에 집중하고 싶어서라고 하셨다.

박영숙 선생님은 한국정치의 변혁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빚어낸 특별한 여성운동가이며, 환경운동가이며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타고난 알뜰한 살림꾼이었다. 1932년 식민지라는 불행한 토양에서 생을 부여받은 선생님은 일찍이 YWCA라는 여성운동단체와 조우(32세에 총무로 발탁)하면서 전후 재건기부터 강원용, 박상증, 강문규, 오재식 등과 함께 한국 사회개혁운동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다.

결혼 후 치열한 민주화운동의 격랑에 휘말리면서 구속자 가족운동, 진보여성운동, 교회여성운동, 국제연대운동 등에 참여하게 된 선생님은 그속에서 한껏 조용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운동 역량과 정치 기량을 키우게 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열린 새 정치 질서 속에서 선생님은 정치 입문을 요구받는다. 이후 국회의원이 되어 가족법 개정 등 여성운동이 제기한 여성 의제들을 하나씩 법제화하는 노력을 폈다. “정치는 시민들에게 보다 나은 삶의 조건을 만들어 주는 과정”이라 믿으며 일했던 선생님은 6년간의 정치 활동을 충실히 마치고 당시 세계적 의제로 대두된 환경문제 해결에 투신하게 된다. 70년대 중반부터 기장여신도회에서 생명문화창조운동을 펼쳐왔던 선생님이 다시 환경운동으로 복귀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리우 환경회의 참석,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의 국제환경정책 연구를 통해 환경이론으로 무장하고 1994년 귀국한 선생님은 다양한 환경운동에 참여하며 1999년 여성환경연대를 설립하게 된다. 베이징여성대회가 설정한 ‘여성과 환경’ 의제를 실행해야 한다고 믿으신 선생님은 환경쪽 여성들을 묶어 열정을 다해 이 단체를 출범시키고 새로운 운동 방식을 모색해 나갔다. 이렇게 60대의 선생님은 새로 출범한 정부의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하며 환경운동의 최전선에서 새 길을 내는 일에 몰두하였다.

여성환경연대 일을 하는 동안 뉴밀레니엄이 찾아오고 있었다. 선생님은 새로운 세기를 맞으며 몇몇 여성운동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획기적 제안을 하게 된다. 후배 여성들이 안정적으로 여성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재정을 지원하는 ‘여성기금’ 조성으로 선배 역할을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단체 운영을 통해 재정 조성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지도자들이라 의견은 쉽게 하나가 되었다. 선생님은 전력을 다해 대통령 영부인을 만나고 사회 각계각층의 지도자를 만나 협력과 지원을 이끌어내는 일에 매진, 1999년 한국여성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한국사회 최초로 시민사회 공익재단 시대를 열게 된 것. 선생님은 70대 중반 넘어까지 여성재단을 발전시키며 현역으로 치열한 삶을 사셨다. 이 밖에도 사랑의 친구들, 미래포럼, 여성평화외교포럼, 적십자도시락봉사활동까지 선생님이 관여하고 추진했던 활동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롭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혜택과 발전된 사회 모습에는 선생님이 80여 년간 바치신 개혁에너지와 열정과 헌신과 기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선생님은 치열한 운동가이면서도 알뜰한 살림꾼으로 유명했다. 그 분이 있는 곳엔 사회개혁 의제와 함께 밥이 있고 고급스런 파티가 있고 꿈을 안고 사는 여성들, 희망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조용한 치열함, 우아한 검약함, 겸손한 강함, 오만하지 않은 지혜로 사람들을 불러내며 선생님은 신념을 실천해 나가셨다.

이런 선배가 계셔서 우린 숱한 좌절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다. 몇 번이고 우리를 놀라게 하시던 선생님이 우리 곁을 표표히 떠나셨다. 후배들에게 많은 사랑과 아름다운 유산을 남기신 채.

사랑하는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하나님 품에서 그리고 안병무 선생님 곁에서 평안을 누리십시오. 우리 모두 선생님이 계셔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2013년 5월 20일

이현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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