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브라틸로바에서 그리너까지 32년
미 여성 프로 스포츠의 ‘커밍아웃’ 역사
미국프로농구(NBA) 선수 제이슨 콜린스(35)의 ‘커밍아웃’ 소식이 화제인 가운데 이보다 훨씬 오래전 여성 동성애자 선수의 커밍아웃은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제이슨 콜린스는 지난 4월 29일(현지시간) 스포츠 전문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흑인이며 게이”라고 털어놓았다. 콜린스의 고백은 ‘미국 프로 스포츠 현역 선수 중 최초’라는 타이틀과 함께 미국 스포츠계뿐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언론은 “나는 게이다(I’m gay)”라는 두 단어가 스포츠 역사를 바꿨다고 평가했고, 동료 선수와 팬들뿐 아니라 버락 오바마와 빌 클린턴 등 두 전·현직 대통령의 지지 성명으로 콜린스는 단숨에 영웅으로 떠올랐다.
콜린스가 국민 영웅의 대접을 받고 있는 가운데 여성계에서는 콜린스가 커밍아웃한 최초 선수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온라인 뉴스 ‘버즈피드’(Buzzfeed) LGBT섹션과 ‘데일리비스트’ 여성 섹션은 “콜린스의 커밍아웃은 여성들에 비하면 수십 년 뒤져 있다”며 32년간의 여성 스포츠 커밍아웃 역사를 정리하는 기사를 내놓았다.
미국 프로 스포츠의 커밍아웃 역사는 1981년 테니스 선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브라틸로바는 그랜드슬램 단식에서 18회, 복식에서 31회, 혼합복식에서 10회 우승하는 등 역사상 가장 많은 승리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테니스협회 선정 ‘올해의 선수’에 7번 오르는 등 ‘테니스 여제’로 군림했다. 당시 나브라틸로바의 고백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고 이는 스포츠에도 영향을 미쳤다. 언론은 여성스런 선수였던 크리스 에버트와 ‘선과 악’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냈다.
데일리비스트는 “여성들이 스포츠에 관심을 갖는 것은 환영받지 못했고 따라서 여성들은 자신들이 ‘괴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여성스러움을 추구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나브라틸로바의 롤 모델로 알려진 전설적인 테니스 스타 빌리 진 킹은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인정했지만 남편과 결혼생활을 지속했다. 빌리 진 킹은 12회의 그랜드슬램 단식 타이틀과 16개의 복식, 11개의 혼합복식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전 윔블던 우승자인 남자 선수 바비 릭스와의 성 대결 이벤트 경기에서 승리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인물. 이후 여자테니스협회(WTA)와 여자스포츠연맹(WSF) 등의 단체를 설립해 여자테니스의 위상을 높이는 데 헌신한 미 여성 스포츠계의 대모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가수인 멜리사 에더리지와 K D 랭, 배우인 엘렌 드 제네러스와 로지 오도넬 등 유명 스타들이 커밍아웃을 선언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나브라틸로바의 고백 15년 후인 1996년과 1998년 프로골퍼인 머핀 스펜서 데블린과 패티 시헌의 커밍아웃이 이어졌다. 머핀 스펜서 데블린은 LPGA 3회 우승자이며 패티 시헌은 LPGA 35회 우승 경력을 지닌 최고의 실력자다.
연이은 여성 골퍼들의 커밍아웃으로 여성 스포츠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이 생겼고, 코치와 매니저들은 여성 스포츠인을 동성애자로 보는 이미지와 싸워야 했다. 그래서 미국여성프로농구리그(WNBA)가 출범했을 때 협회는 선수들에게 머리를 길러 포니테일로 묶고 화장과 스커트 착용까지 요구하는 등 여성스러워지도록 압력을 넣었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전 여성농구팀 코치였던 르네 포틀랜드는 ‘레즈비언 제외 정책’을 주장해 비판을 받았고 2006년 한 여성의 고소로 사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과목의 남녀 차별을 없앤 타이틀 9(Title IX) 법안으로 여학생들의 체육교과 참여가 가능하게 된 이후 더 많은 여성들이 스포츠 경기에 참여하게 됐고 여자축구, 여자마라톤 등의 부흥이 일어났다. 스포츠계의 여성에 대한 장벽이 허물어져 동성애자가 아닌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 근육을 자랑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더 많은 여성 선수들이 커밍아웃을 선언했다. 2002년 농구선수 수 윅스, 2004년 농구선수 미셸 반 고프와 골퍼 로지 존스, 2005년 농구 선수 셰릴 스웁스 등이 동성애자임을 밝혔다. 2012년에는 세 명의 농구선수 앰버 해리스, 제시카 아데어, 시몬 세이모네 아우구스투스와 두 명의 축구선수 메건 라피노에, 로리 린지, 배구선수 스테이시 사이코라 등 6명이 한꺼번에 커밍아웃을 하기도 했다. 또 지난 4월 WNBA 신인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피닉스 머큐리 행이 확정된 브리트니 그리너도 동성애자임을 인정한 바 있다. 그리너의 경우 NBA 구단에서 신인 드래프트 지명 의사를 밝혀 최초의 여성 NBA 선수가 될 가능성도 보이고 있다.
데일리비스트는 여성 스포츠 스타의 커밍아웃에 비해 제이슨 콜린스의 커밍아웃이 영웅시되는 것을 비판했지만 콜린스에게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과격한 남성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레즈비언은 스포츠에 어울리지만 게이는 여성스러운 일에 어울린다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콜린스의 커밍아웃은 남녀 모두에게 더 많은 길을 연 일보 전진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