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30주년 맞아 송보경·김재옥 역대 회장에 이어 차세대 주자로 기대 모아
“과학적·국제적으로 품질 대비 가격 비교 평가… 명품의 허상 벗기고파”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갓 입학한 1970년 어느 날, 그는 스승 이효재 선생에게서 사비로 5만원의 특별 장학금을 받았다. 당시 서교동에 있던 협동교육연구원에 찾아가 송보경 조사부장에게 협동조합에 대해 배우고 오라는 것이 명목이었다. 일종의 근로장학금이었다. 이게 그가 걸어온 여정의 첫 단추였다.

지난 4월 1일 창립 30주년을 맡은 소비자시민모임(소시모)의 새 사령탑이 된 김자혜(62·사진) 회장의 얘기다. 그의 취임이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1995년부터 2013년 초까지 번갈아 회장을 역임하며 소시모를 국제적 소비자 단체로 키워낸 송보경·김재옥 두 역대 회장 시대 이후 첫 세대 교체란 점에서일 것이다. 서울 종로 신문로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선덕여왕 시대 식으로 말하면 내가 소비자운동의 진골 아니냐”는 농담을 건넸다. 여기엔 송보경, 김재옥 그, 3인이 거목 이효재 선생의 제자로 연이 맺어져 있다는 자부심이 함께 배어 나왔다.

 

이효재 선생의 장학금으로 협동조합 활동… 송보경 전 회장과 첫 인연

“이효재 선생님이 우리 세 사람이 오랜 세월 함께 소비자운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시면서 무척이나 흐뭇해하고 대견스러워 하시곤 했다. 따지고 보면 ‘이효재’라는 거목의 한 뿌리에서 나온 씨앗 아닌가. 후배로서 나는 참 행운아다. 송보경 전임 회장으로부터는 ‘소비자운동은 곧 생명운동’이라는 소비자운동 본연의 철학과 가치관을 배웠고, 김재옥 전임 회장에게선 추진력, 적극성, 열정과 일 욕심, 그리고 결벽스러울 정도의 완벽주의를 배웠다. 김 회장 밑에서 일하려면 100점이 아니면 부족하다(웃음). 지금도 새벽 한두 시에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일을 마무리하곤 한다. 한창 분주한 낮 동안의 근무 시간엔 소비자 이슈 개발이라든지 홍보 전략, 정책 반영 등 좀 더 심층적인 비전을 구상할 수 없다. 그래서 귀가 후 한밤중에 작업할 수밖에 없다.”

그는 대학원 졸업 후 소시모 활동과 함께 20여 년간 강의를 병행해왔다. 모교를 비롯해 덕성여대, 인하대 등에서 사회학개론, 가족사회학, 농촌사회학 등을 강의했다. 그러면서 소비자 문제의 본질을 깨달아갔다. 그것은 우리가 편하게 유지해오던 통념의 파괴이며 ‘우리가 바꾸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회적 정의감이었다.

“‘아, 소비자와 기업의 관계는 갑을의 관계구나’ 하고 깨달은 시작은 산부인과병원을 조사하면서 산모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분유에서 기업의 논리를 짐작하면서부터다. 이로 인해 엄마가 아기에게 특정 기업의 분유를 계속 먹일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 모유가 아닌 분유를 먹여야 건강하고 튼실한 아이가 된다는 세뇌는 기업의 리베이트 결과였다. 그리고 80년대 후반 자원봉사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해나가면서 소비자 이슈에 완전히 민감해졌다. 두 손과 두 발을 다 이곳에 정식으로 담고 전념하게 된 계기는 1995년 서울시의 식품 명예감시단으로 활동하면서다. 이를 통해 학교와 병원만은 위생적일 것이라는 통념이 충격적으로 깨졌다. 당시 위생 관련 과의 담당 공무원과 소비자 시민단체 관계자가 한 조를 이뤄 현장을 돌곤 했는데, 한 병원의 장례식장 식당 사업주가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 우리에게 각각 봉투 하나씩을 내밀었다. 그게 일종의 인사이고 관행이었다.”

그는 시장과 음식점 등 발로 뛰는 현장 조사를 병행하며 소비자운동의 밑바닥부터 본격적으로 전개해나갔다. 하루 20여 건의 상담을 받다보니 일주일에 평균 상담 100여 건을 처리하게 됐다. 이러다보니 일주일치의 소비자 리포트가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1996년 한 방송을 통해 이 일주일간의 소비자 이슈를 중심으로 ‘이러지 좀 맙시다’라는 현장 제안이 1년간 제작됐다. 그는 이를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살아 있는 체험이었다”고 회고한다. 자신의 경험 때문에 소비자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우선 상담 전화부터 받으라”고 적극 권고하곤 한다. “대학 교수들이 은퇴 후 소시모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그때는 이미 늦다”며 “젊어서부터 자원봉사 해 직업의식을 가지고 하루 10시간 이상을 올인해야 생존이 가능한 게 바로 소비자운동”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지자 일주일 사이에 금융 상담이 쇄도했다. 아파트 중도금 때문에 금융권에서 9~10%의 고정 금리로 대출을 받았는데, 이들 회사가 IMF를 핑계 대며 단번에 이자율을 올리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는 하소연들이었다. 그래서 변호사들의 자문을 받아 개별 소송을 시작했다. 소비자들과 고정금리로 약속했으면 경제적 변동이 있더라도 고수해야지 왜 이자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느냐고 문제 제기를 했다. 그런데 똑같은 여건인데도 불구하고 판사에 따라 승·패소의 명암이 갈렸다. 억울해 항소까지 했어도 패소한 사례가 있어 소송 당사자의 부담만 늘린 것 같아 지금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 경험을 통해 집단소송제의 필요성이 절실함을 다시 깨달았고, 이 제도의 도입이 우리의 숙원 사업 중 하나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집단소송제를 대선 당시 공약한 만큼 한번 기대해본다.”

 

“사회정의 이뤄지는 현실에 매혹돼 25년 한길”

그는 최근 가습기 살균제로 숱한 인명이 희생된 것만 봐도 “집단소송제만 있었으면 한두 명을 대표로 해 승소하면 피해자 모두 보상받을 수 있었을 텐데, 너무나 억울한 일 아니냐 ”며  “‘기업이 망한다’는 통념 탓에 집단소송은 최후로 밀어두려는 게 바로 기업의 논리인데, 시장에서 집단소송이 자연스레 이뤄져야 품질과 기업의 대처 능력이 함께 향상될 것”이라고 역설한다. 산업화·민주화 시대를 거쳤으니 이제 집단소송제를 포용할 만큼 사회가 충분히 성숙해지지 않았느냐고도 반문한다.

“시장이 변화하고 법과 제도가 변하는, 손에 잡히는 성과”를 내는 소시모 활동의 역동성은 그를 매혹시켰다. 여기에 1980년대 이화여대에 여성학과가 개설돼 사회학자로서 강의를 해본 경험을 통해 “여성운동과 생명운동, 그리고 소비자운동은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최첨단의 스마트폰 시대, 소비의 트렌드 변화도 급격하다. 최근 두드러진 현상은 착하고 합리적이며 사회적인 소비, 가치 소비다. 이제 소비자들은 직접적 이해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대기업 임원의 여승무원 폭행, 거대 유제품 기업의 대리점에 대한 횡포 등 기업의 비윤리적 행태에 분개하며 불매운동까지 벌인다. 이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소비자운동 시대에 소시모의 새로운 역할은 무엇일까.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핵심은 연대와 인적자원이다. 이 맥락에서 2,3년 전부터 국제적 소비자 조사 기구들과 연대해 국제시장에서 판매·유통되는 유모차, 가전제품, 스마트폰, 태블릿 등에 대한 품질 대비 가격 조사를 하고 있다.

1990년대에 방송광고 심의를 5년 이상 한 경험을 통해 보건데, 광고를 많이 하면 할수록 소비는 증가하기 마련이다. 대기업일수록 광고를 많이 하고, 유명 모델을 쓰게 될 경우 그 어마어마한 모델료는 고스란히 소비자 부담이 된다. 한편으론 마트에서 샴푸 하나를 고르더라도 광고를 통해 친숙한 대기업 제품을 마다하고 생소한 중소기업 제품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우리 세대에 비해 3040 세대는 브랜드에 너무나 현혹돼 있다. S로 시작하는 소위 명품 유모차의 경우, 아파트 입구에 주차도 힘들고 웬만한 자동차 뒤 트렁크에는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비실용적인데도 내 며느리조차 그걸 사고 싶어 하는 눈치더라(웃음). 명품을 사지 말라고 하기보다는 그 브랜드 뒤에 숨겨진 허상과 진실을 알려주는 게 이제 우리의 책임이라 생각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두 기업 제품에 대해 나란히 공평한 품질 테스트를 하고 그 결과 늘 ‘싼 게 비지떡’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스마트 소비로 유인해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광고비 하나 안 받고 매월 꼬박고박 내는 ‘소비자리포트’가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유모차를 비롯해 화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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