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꼬부랑길 걸으며 시간의 구속에서 벗어나세요”

“여기서 태어나 자라 현재까지도 살고 있는 어떤 분이 말하길 ‘평생 이곳에 살면서도 나무 한 그루, 집 한 채의 의미를 모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며 이젠 ‘마을 여기저기가 새롭게,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고 흥분해 말하더라. 농사짓는 분들은 ‘시골에 살면 패배자, 도시에 살아야 성공한 사람’이란 생각을 흔히들 하는데, 귀농 후 이 편견을 고쳐주려 노력해왔다.”

"농촌 살면 패배자, 도시 나가면 성공"이란

생각부터 고치고 싶었다"

완도 청산, 담양 창평 등에 이어 2009년 국내에서 여섯 번째로, 중부권 최초로 ‘슬로시티’(Slow-City) 인증을 받은 충남 예산 대흥. 2011년 2월 주민협의체로 예산대흥슬로시티협의회(회장 최동헌 대흥면이장협의회장, 이하 협의회)가 발족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후발 주자임에도 다른 슬로시티들의 관심을 집중 받으며 슬로시티의 새로운 청사진을 그려가고 있는 그곳의 중심에는 역시 ‘사람’이 있었다.

협의회 실무를 총괄하는 박효신(65·사진) 사무국장은 1970년 기자 생활을 시작, 여성신문 편집장 등을 거쳐 한국광고주협회 임원에 이르기까지 35년간을 서울 한복판에서 커리어 우먼의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그 와중에도 퇴직 후 제2의 삶으로 부모님이 계신 대흥으로 귀농을 꿈꾸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년 전. 높은 연봉을 포기하고 2004년 대흥 근처의 온양민속박물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공주대 산업과학대학원에서 초보 농부에게 필요한 교육을 받고 2006년 농부의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자칭 ‘초보 슬로시티어(slowcitier)’로서 제3의 삶을 살고 있다. 2009년 대흥이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을 당시 이 사건의 의미를 주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는 문제로 이장, 면장들이 모인 회의에 참석했다가 “'슬로시티로 인증 받으면 수십억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고 얘기하면 된다”는 식의, 하드웨어 인프라 구축 중심의 얘기가 오가는 것을 들으며 ‘이건 아닌데…’라고 회의를 품기 시작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됐다.

“슬로시티는 정신문화운동이자 일종의 농촌마을 살리기 운동”이라며 “가장 농촌다운 것, 시골스러움이 바로 농촌의 최대 경쟁력이고, 이것은 곧 공동체 부활운동”이라고 자신하는 그와 느린 꼬부랑길을 걸으며, 마을을 둘러보며, 그리고 밥상을 마주하고 시간의 구속에서 오랜만에 풀려나 느릿느릿 얘기를 나누었다.

-대흥 슬로시티는 무엇인가 인증을 받으면 우선 시설 기반부터 갖추려는 조급함과는 정말 거리가 멀다. 지난 2년간의 최대 성과를 꼽는다면.

“주민들의 생각이 ‘나’에서 ‘우리’로 바뀐 것을 꼽고 싶다. 이렇게 ‘우리’라는 생각이 다시 되살아나면서 우선 주민들의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주민들이 슬로시티에 보내는 신뢰나 협조는 절대적이다. 지난해 12월 동절기 체험인 전통 썰매장을 개장할 때만 해도 주민들이 나서서 100개의 썰매를 직접 만들고, 눈이 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이른 아침부터 나와 썰매장 눈을 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했다. 물론 방문객들도 숫자로는 10배 이상 늘었고 대흥이라는 곳이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마을의 브랜드 가치도 상당히 높아졌다. 우리 마을의 발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국내 다른 슬로시티들과 차별화된 점을 꼽는다면.

“사실 우리 마을은 아주 평범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다른 슬로시티들과 비교해 볼 때 외형적으로 특별한 것은 없다. 우리 마을의 강점은 마을에 담고 있는 콘텐츠와 그것을 운영하는 맨 파워다. 마을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들은 생태문화 교육을 받은 주민으로 구성된 해설가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진행되고 있다. 특히 우리 마을 체험 프로그램들은 방문객들의 연령, 성별, 여행 목적 등에 맞춰주는 맞춤형 체험이기 때문에 매번 발전하고 진화한다.”

“주민 생각이 ‘나’에서 ‘우리’로

바뀌어 정말 기뻐요”

-다른 지자체들의 벤치마킹도 줄을 잇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개 슬로시티 운동이나 다른 마을 살리기 운동을 할 때 말은 ‘운동’이지만 비즈니스를 앞세우게 된다. 빨리 돈을 벌어서 주민들을 잘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을은 처음 시작할 때 비즈니스보다는 운동을 선택했다. 운동이 성공하면 경제적인 면은 따라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비즈니스를 앞세우면 운동이 성공하기는 힘들다. 초기 지원금 대부분도 헌 집을 개조한 방문자센터를 제외하곤 인적자원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콘텐츠에 주로 투자했다. 우리 전략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가는 것이다. 주민들이 마음으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주고 함께 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귀농 체험자로서 슬로시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슬로시티운동은 주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개발과 경제적 발전이 아닌 자연환경과 전통을 잘 보존하는 일, 그리고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주요 아이템인 귀농 체험 프로그램이 눈길을 끈다.

“우리 귀농 프로그램의 캐치프레이즈는 ‘살아보고 결정하세요’다. 농촌생활을 미화하지 않고 실제와 똑같이 경험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2~7일간 농가에 머물며 파종, 장터에서의 장사, 마을회관에서 동네 주민들과의 어울림 체험을 하는 단기 코스, 1~3개월간 농가에 머물며 푸성귀, 옥수수, 감자 등 시기별 작물을 파종해서 수확까지 체험하게 하는 중기 코스, 그리고 3개월 이상 장기 체류하면서 파종, 수확 후 직접 먹거리로 만들어보면서 농사의 풀코스를 직접 경험케 하는 장기 코스로 운영라고 있다.”

-40여 년 만에 부활시킨 ‘의좋은형제장터’(매달 둘째 주 토요일)가 대박 상품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후 주민들의 마인드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장터에 나오는 농산물은 주민들이 직접 농사지은 것만 팔고 있다. 도시인들에게는 진짜 우리 농산물을 믿고 살 수 있는 기회이고, 놀이마당에선 제기차기 등 우리 전통놀이를 이벤트로 진행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30~40명 인원만 모으면 수도권 방문객에게도 버스를 보내줄 수 있을 정도로 수익도 쏠쏠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들이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한자리에 모여 만난다는 것이다. 장터는 공동체 소통의 장이 되고 있다.”

“내 시간 단위는 ‘계절’...

시간과 놀며 하루를 보낸다”

-향후 예산대흥슬로시티의 목표와 비전을 어떻게 잡고 있는가.

“목표는 바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슬로시티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 마을의 젊은 층에게 설문조사를 해봤다. 우리 마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의외의 답이 나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멋진 마을회관이나 돈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 가지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희망’이었다. 주민들 가슴에 자부심과 자존감, 그리고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슬로시티운동의 목표다.”

-슬로시티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속가능한 발전은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마을 전체가 힘을 모아야 하는데 주민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고 이끌어가고 책임지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마을을 가꾸기 위해, 특히 보기에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한시적으로 외부의 힘에만 의존하게 되면 주민들의 동참을 이끌어내기 힘들고 또 자생력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느리고 세련되지 못하더라도 길게 보고 가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귀농 후 스스로를 ‘풀각시’라 부르며 블로그에 새 삶의 감흥을 담아냈고, 이를 여성신문에 칼럼으로 연재, 후에 에세이집 ‘바람이 흙이 가르쳐주네’로 엮어 반향을 일으켰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엇을 피해 농촌으로 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귀농은 또 하나의 창조적 삶의 시작”이라는 그의 충고는 여전하다. 가수 바비킴의 광팬으로 때론 콘서트를 보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가 새벽녘에야 귀가하기도 한다는 그에게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반짝거리는 눈동자. 새벽 4시면 눈을 떠 7시까지 각종 서류 작업과 사무를 보고 하루 종일 방문객과 만나고 마을 일을 하다가 밤 11시쯤에야 잠자리에 든다는데, 어찌 그리 소녀 같은 눈동자를 가질 수 있을까.

“내 생활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옛날에는 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