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가족, 그 안과 밖의 사연
신사임당이 결혼 후 시월드에 매였다면
지금 5만원권 지폐에 얼굴 못 올렸을 것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 이순구 / 너머북스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 이순구 / 너머북스
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
‘시월드’라는 말이 유행이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등 ‘시’자 들어가는 사람들의 세상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처월드’는 왜 없냐고 항변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면 ‘처월드’보다 ‘시월드’가 여전히 우세한 것만은 틀림없다. 사람들은 시월드의 원흉(?)으로 조선을 지목한다. 봉건적 유교질서 속에서 구조화된 가부장제도가 조선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을 읽어보면 생각이 조금 바뀔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1000개는 아니지만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조선의 가족사가, 특히 여성이 우위에 있었던 숱한 제도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처음 제시한 증거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다. 요즘도 ‘장가(丈家)간다’는 말을 많이 한다. ‘장인 집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즉 조선시대의 보편적인 혼인 풍습은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결혼하는 것이었다.

혼인 예식만 치르고 바로 시월드로 돌아가지 않았다. 김종직, 이이 등 조선시대 명사들은 대개 외가에서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혹은 그 이후까지 여자들은 친정에 머물러 있었다. 남자는 본가와 처가를 주기적으로 오가며 생활했다. 심지어 신사임당은 혼인하고 근 20년 만인 서른여덟 살에 비로소 친정을 떠났다. 신사임당이 결혼과 동시에 시월드에 매였다면, 지금 5만원권 지폐에 얼굴을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결혼한 여성들이 시월드를 멀리하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사다.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등 고생은 오로지 여성의 몫이고, 생색을 내는 건 남자들만의 일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제사는 지금과 달랐다.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들어서면서 가부장제가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윤회봉사(輪廻奉祀)와 분할봉사(分割奉祀)가 보편적이었다.

윤회봉사란 말 그대로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는 것이다. 올해는 큰아들이, 내년에는 둘째아들이 지낼 수 있었다는 말이다. 분할봉사는 제사를 분담하는 것으로 아버지 제사는 아들이, 어머니 제사는 딸이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남귀여가혼과도 밀접히 관련이 있는데, 혼인해서 여자 집에 오래 거주하는 형태이다 보니 딸과 사위가 제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을 억압한 대표적인 것이 ‘칠거지악(七去之惡)’이었는데, 칠거지악 때문에 부인이 쫓겨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칠거지악의 악조건을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을 낳지 못하면 양자를 들였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남귀여가혼에 따라 남자가 본가와 처가를 오가며 생활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부부라도 동거 비율이 매우 낮았다. 이는 부부 갈등의 첨예화를 막는 데 일조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물론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은 여성과 관련한 이야기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노비와 기생, 서얼 등 가족과 얽힌 다양한 사연들을 풀어낸다. 조선의 가족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열녀도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화석처럼 각인된 역사상을 버리면 옛사람과도 공감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시대가 변해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다지만, 여전히 여성은 약자인 경우가 많다. 남성과 여성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해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은 새롭게 읽혀야 할 책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