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세프 한국위원회 박동은 부회장 “놀 권리 빼앗는 아동 학대, 제발 그만”

1988년 주한 유니세프 대표부 대외담당관으로 유니세프와 첫 인연을 맺은 지 올해로 사반세기, 25년째인 박동은(78·사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부회장. 희수를 넘긴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은 분위기에 격의 없이 털털했다. 여전히 현역으로 “개인 생활이 엉망이 될 정도로” 바삐 뛰고 있는 그를 빼놓고 한국의 아동 구호 역사를 말할 수 없으리라. 이런 공로로 YWCA의 한국여성지도자상, 비추미여성대상 해리상 등을 수상한 그는 장기간의 사무총장 직책을 내려놓자마자 지난해 4월부터 부회장으로 새롭게 업무를 시작해 한국위원회를 진두지휘 중이다.

94년 32억원에서 1000억원 규모로, 국제 모금 순위 7위

‘차별 없는 구호의 정신’으로 전 세계 어린이, 특히 개발도상국의 빈곤층 어린이를 지원하는 유엔기구 유니세프(UNICEF·유엔아동기금)는 1946년 12월 11일 창립됐다. 한국과는 1948년부터 관계를 맺기 시작, 1950년 3월 정부와 기본 협정을 체결하고 공식적인 활동을 전개해온 이래 한국전쟁 등 역사적 격동기를 거치며 1993년까지 약 2300만 달러에 이르는 지원을 해왔다. 박 부회장은 한국의 경제성장과 맞물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창립의 실무를 총괄했다. 이는 또한 유니세프 내에서 수혜국이 공여국으로 발전한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94년 당시 32억원 정도의 규모에 직원이 채 20명도 안 되는 상태에서 시작, 그해 350만 달러를 유니세프 본부에 보냈는데, 지금은 40여 명의 직원에 1000억원 규모의 기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니 많이 발전했죠. 어떤 유명 아동 구호단체는 700여 명의 직원으로 연간 1700억원을 모금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40여 명이 1000억원을 모금하니 효율성 면에서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효과적인 기금 모금을 위해 재벌 총수나 군 장성을 총재로 모셔와 앞세우자는 등 별별 의견들이 많았지만 유니세프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신념과 고집으로 버텨왔습니다. 오히려 장기적인 비전에서 다양하게 후원회 조직을 만들어 운영해왔는데, 이게 막연한 펀드 레이징(fund raising)보다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30만 명에 이르는 회원들, 이들이 바로 우리의 힘이죠.”

그의 모금 원칙은 억지로 내는 돈, 불편한 돈은 ‘거부’한다는 것이다. 한 재벌 회장의 모친은 수차례 만나도 돈 얘기를 일절 꺼내지 않는 그에게 참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고 한다. 후에 그 여성이 자발적인 후원 회원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더 큰 모금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죠. 이때 투자란 텔레마케팅, DM 발송, 일대일 개인 면담, TV 광고, 신용카드사와의 공동 캠페인 등 대국민 홍보를 뜻합니다. 예전처럼 유니세프 카드를 팔던 시대는 이미 지났죠. 왜 아동을 구호해야 하는지 억지로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전문 지식이 필요한 때입니다. 2010년 한국위원회가 태국, 베트남, 중국 등 아시아 10개국 소외계층 어린이들에게 교육사업을 독자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자발적인 기부 때문이었어요. 당시 84세이던 한 할머니가 자신의 유산 100억원을 기부하면서 아시아의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에 써달라고 명확히 밝히신 덕분이죠. 이 할머니는 기부하기 전에 과연 이 돈을 어떤 단체에 기부해야 하나 석 달을 고민하셨는데, 홍보를 통해 익히 접했던 유니세프의 브랜드가 가장 마음에 들고, 유니세프가 공평하게 아이들을 구호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판단하셔서 기꺼이 우리를 도움의 창구로 택하셨던 거예요. 예전에 남아프리카 만델라 대통령 시절 독일의 한 선박왕이 400만 달러를 기부해 그곳 위원회에서 스쿨 포 아프리카(School for Africa)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 연상되면서 뿌듯했답니다.”

“억지로 내는 돈, 불편한 돈은 사절합니다”

한국위원회는 유니세프 본부에 최소한의 운영비를 뺀 7000만 달러 상당의 구호성금을 곧 보낼 예정이다. 유니세프 규정상 한국에선 아동 구호를 할 수 없고, 교육과 홍보사업만 해야 하는 제약이 있지만, 본부에 보내는 구호성금 중 20% 정도는 위원회 재량에 따라 17개국 정도의 국가를 지정해 지원할 수 있다. 현재 156개 개발도상국에 유니세프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고 36개 선진국에 국가위원회가 설치돼 있는데, 이들 국가위원회에서 매년 보내는 성금이 유니세프 총 예산의 30%를 차지한다. 한국위원회의 구호성금 실적은 36개 국가위원회 중 7위에 해당할 정도로 상당히 높다. 위원회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그의 관심도 자연히 유엔아동권리협약을 한국이 얼마나 잘 주도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지에 집중돼 있다. 그는 지난 2005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를 비롯해 굿네이버스, 월드비전,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 등 총 14개의 단체와 아동 전문가들이 참여해 발족시킨 유엔아동권리협약 한국비영리기구(NPO) 연대 창립총회에서 초대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는 1959년 동아일보 공채 1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미국 오리건주립대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했던 3년7개월 외엔 단 한 차례 휴지기도 없었다고 회고한다. 젊어서부터 결혼을 먼 훗날 남의 일처럼 생각, 자연스럽게 독신생활을 하게 됐다는 그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 때마다 평탄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급여, 복지 등 당시로선 여건이 꽤 만족스러웠던 기자 생활을 10년도 채 안 돼 그만둔 것도 그랬고, 유학 후 교수가 될 수 있었던 상황에서 굳이 교수직에 집착하지 않았던 것도 그랬다.

“내가 만약 서울대에 합격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거예요. 경기여고를 다녔는데 친한 친구 8명이 모두 서울대 법대에 붙었는데, 나만 숙명여대(영어영문학과)로 갔어요. 그때부터 남자들과 경쟁하며 커야겠다고 꿈을 키웠죠. 그런데 막상 신문사에 들어가보니 기자 생활은 적성에 맞았지만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다 남자, 스트레스가 격심했어요. 우린 지면을 땅값에 비유하곤 했어요. 문화부 기자를 할 때는 쓰는 만큼 대문짝만 하게 기사를 낼 수 있었는데, 사회부 기자를 하니 작은 2단 기사도 내 이름을 달고 나오기 힘들었어요.  외신부에 가고 싶어 밤새워 애원했는데, 남자 동기들의 견제가 더 심했어요. 특근이라도 더 하겠다며 여기자 오는 것을 막더라고요. 그래도 김포공항을 출입처로 해서 쪽 찐 외국 여자, 바늘 없는 주사기, 동두천 위안부 등 공항을 오가는 특이한 이들을 관찰해 쓴 ‘나그네의 눈’ 칼럼은 지금도 종종 기억난답니다.”

그는 1976년부터 대한가족계획협회(현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 홍보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후 10여 년 정말 재미있게 일했다고 한다. 지금은 초저출산 위기 시대이기에 다소 낯선 얘기지만,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자고 주장하던 시절 그는 현장을 뛰면서 굳건한 아들선호사상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가족계획협회 업무 중 절반은 대국민 홍보일 정도로 홍보가 굉장히 중요했어요. 개인적으론 개발도상국일수록 여성들이 아이 낳는 데 일생을 보내다가 자기 계발과 노후 준비를 못 하고 있는 데 문제의식이 강했어요. 가족계획을 잘 세워 각 가정 형편에 알맞은 수의 아이를 낳고 이들을 정예부대로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무조건 결혼이 아니라 가정을 가질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만이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당시 현장조사 결과 아이 둘 정도를 낳는 것은 국민 정서상 상당히 허용되는 부분이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남아선호사상을 없애는 것이 일차 과제였습니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표어 작업도 총괄했어요. ‘무서운 핵폭발, 더 무서운 인구폭발’ 등 표어도 만들었는데, 기자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남아선호사상을 비꼬는 콩트도 썼죠. 2000년대 들어가면 한 가정에 한 아이, 딸 낳은 부모 어깨가 더 으쓱해질 것이라는 등 재미 있는 예측도 해보곤 했는데, 요즘 다 그렇게 되고 있잖아요? 협회 일이 재미있었던 것은 인구 문제는 무궁무진하게 넓은 영역이기에 성교육, 모자보건, 청소년 교육까지 활발하게 다룰 수 있었다는 점이에요. 후에 유니세프 활동을 할 때도 협회에서의 경험이 유용했습니다.”

그는 “저출산은 이미 70년대 말부터 국제적 트렌드였다”며 “(위기 상황에 호들갑을 떨기보다는) 인구정책에 유연성을 가지고 인구가 늘어나면 줄어들 수 있도록, 줄어들면 늘어날 수 있도록 매력적인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89년 나온 아동권리협약은 지구상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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