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옥이네 집은 어디인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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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허은숙 화백
Y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자신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멍청한 표정이 거의 30초 이상 얼굴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반응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반응은 다른 때와 사뭇 달랐다. 여자 이야기를 하면 언제나 선도 높은 생선을 고르듯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지나치게 각이 느껴지면, 혹시 어머니가 불행하다면 바로 저 점 때문이다, 등 뒤에서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어머니는 아주 간단하게 그래? 그런 여자가 있었어? 나쁜 놈! 이랬다.

어머니가 순간적으로 내뱉는 나쁜 놈이란 의미의 층위가 복잡했지만 아들은 대충 두 가지로 이해하는 편이었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거나 참을 수 없이 실망했다거나.

“그런 여자 있으면 엄마한테 말했어야지! 사방에다 아들 장가 보내달라고 말하는 게 이젠 민망할 지경이다!”

어머니의 목소리엔 기쁨이 거품처럼 고여 있었다. 도대체 그 나이 되도록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먼저 말한 건 이게 처음인가 싶었다. 유치원 다닐 때 짝꿍이던 그 여자애, 초등학교 일 학년 때 부반장 하던 여자아이, 그리고… 처음이었다.

물론 수월했던 건 아니었다. 어머니가 다시 역삼동 박 교수 알지? 친구 딸이 있단다. 디자이너라던가? 아니 화가랬지? 하며 주말에 봐라, 그랬었다. Y가 부리나케 성옥의 존재를 고백하도록 한 이유였다.

“그 여잔 직업이 뭐니?”

“대학생이에요.”

“그럼 너무 어린 거 아니냐? 사내들은 그저 어린 여자라면.”

어머니는 혀를 찼다. 그러나 그건 그저 그러는 거였다.

“하여간 보자! 날을 잡아. 하루라도 빨리 보는 게 낫지!”

어머니가 말했다. 순간 아들은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걸 감지했다. 

전화를 끊고 Y는 자기가 어디까지 말했던가? 되짚었다. 대학생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4학년이라고 했는지, 전공이 중국어라고 했는지, 성균관대학이라고 학교를 밝혔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탈북 여성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어쨌든 어머니가 당신의 외며느리, 아들의 두 번째 아내를 고르는 일에 이토록 즉흥적인 모습을 보인 건 너무도 뜻밖이었다.

Y는 새삼 달력을 들여다보았다. 주말은 이상하게 아무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고 표시도 없었다. 약속이 없는 날이었다. 그는 달력의 날짜와 날짜 사이의 비어 있는 여백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숫자 속에서 ‘운명’이란 의미가 가물가물 피어오른다고 느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성옥의 삶의 허리를 뚝 잘라놓은 압록강이 손에 잡힐 듯 떠올랐다. Y가 느끼는 운명이 그 강을 건너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지금 강을 건너야 하나… 사뭇 비장해졌다. 오래전 어두운 산기슭에서 나뭇가지에 긁히고 돌부리에 걸리고 미끄러지며 강기슭으로 닿아야 했던 성옥의 시간엔 비장할 여유도 없었다. 배낭 하나 가득 옥수수를 얻어 곧 돌아갈 것이어서 며칠을 주린 허기도 견딜 수 있었다. 성옥이가 죽으면 어머니 아버지도 죽을 것이어서.

성옥의 그 시간은 Y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성옥의 삶에 감당할 수 없는 눈물주머니 같은 혹, 그 시간으로 Y의 자유로운 인간애가 닿을 수 있을까. 경험의 파장(波長)에게 물어봐야 할까.          

순두부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 물고 꽁초가 되도록 연기를 마시고 뱉다가 그는 조금 지친 기분으로 의자에 푹 기대앉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잡히지 않는 느낌이 그를 빼곡하게 에워싸고 있다는 건 느꼈다. 그는 그 느낌 속에서 성옥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손을 놓은 그 남자 Y는 유튜브로 들어가 카타리나 비앙코의 노래를 꺼냈다. 이건 그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심각하고 심란하고 비장할 때 담배나 독주처럼 찾아 듣는 그 노래는 제목이 ‘아, 인생이여’였다. 두 번 듣고 다섯 번 더 듣고 열 번 더 들었다. 이윽고 비앙코의 목소리가 멀어질 즈음 그는 성옥의 번호를 눌러 문자를 썼다.

주말에 뭘 해? 만날까?

그는 글자의 획 하나하나가 모여 어떤 의미를 만드는 과정에 풍덩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몸이 하염없이 빠져들도록 놓아뒀다. 그는 말의 의미 속으로 익사하는 자기를 느꼈다. 호흡이 멈춘다고 느낄 때,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순간 그는 빛의 속도로 솟구쳐 올랐다.

네. 좋아요. 어디로 갈까요?

한눈에 들어오는 문자를 확인하며 그는 전화기를 가슴에 댔다.

집으로 올래?

네. 갈게요. 오전엔 알바가 있고, 오후 4시 괜찮으세요?

그래, 기다릴게.

Y는 기다릴게, 뒤에 하트 문양을 일곱 개나 넣고 싶었다. 하지만 억지로 참았다.

주말이라는 토요일은 길고 때론 가깝고 어떤 순간엔 지루했다. 받아놓은 날, 주말이란 시간에 대한 이런 수다스런 변덕은 Y와 성옥이 함께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일정하게 지나가고 다가왔다. 그는 아침부터 무지개 너머라는 노래의 앞 두 소절을 연신 흥얼거리며 화장실과 거실, 침대 매트까지 청소했다. 걸레를 빨아 창틀과 액자 틀과 침대 모서리 따위를 샅샅이 문질렀다. 오후 2시쯤 되었을 땐 온 집안이 세수를 한 것처럼 말끔하고 청결하고 순결하기까지 했다. 그는 화장실 타일과 변기와 세면기, 그리고 거울까지 티 하나 없는 게 신기하고 좋아서 히죽거리며 자꾸만 들여다보았다.

점심은 라면을 끓여서 먹었다. 배가 부를까봐, 들었다 놨다 하던 달걀은 넣지 않았다. 그는 이를 정갈하게 닦고 거실 한가운데 서서 이제 무얼 하지? 생각했다. 4시라는 시간엔 무쇠가 달라붙었는지 속도가 더디고 더뎠다. 그는 육감으로 느껴지는 시간이 싫어서 밖으로 나갔다. 가게들을 걷다가 문득 꽃가게에 들어갔다. 노란 장미를 샀다.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꽃송이에 코를 댔다. 입으로는 …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그가 아침부터 흥얼거리던 노래가 거미줄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장미를 정성을 다해 병에 꽂았다. 원형의 꽃병은 어머니의 선물이었다. 여자가 없으니 가끔 꽃이라도 사다 꽂아서 사내 냄새를 없애라던 말까지 기억했다. 불쑥 어머니가 그리웠다. 갈증 같은 느낌은 곧 사라졌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장미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시계는 보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노래도 흥얼거리지 않았다.

한 사람이 내게 온다, 그는 어디서 보았을지도 모를 시 같은 문장을 떠올렸다. 한 사람이 내게 온다… 한 사람… 이.

그는 커피를 진하게 내려 한 모금씩 혀에 적셨다. 쓴맛은 아름다운 맛이다, 그는 이런 문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빈 잔을 들여다볼 때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다. 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구르듯 가서 문을 열었다. …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활짝 웃는 얼굴을 보았다. 그도 활짝 웃었다. 그러나 가슴이 미어져서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은 것만 다행스러웠다.

“좀 일찍 왔어요.”

성옥이가 Y의 숙연함에 물들어, 거짓말처럼 웃음도 다 지워진 표정인 채 한동안 아무 말 못 하더니,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느 새 만개한 꽃잎처럼 벌어진 그의 품으로 빨려들었다. 떨리고 솟구치는 호흡이 두 사람의 틈 사이에서 부풀었다가 풀리곤 하였다. 그 속에서 눅눅한 숙연함이 공기에 섞여 흔적을 감추기 시작했다. 성옥이 그를 지긋이 밀어낼 때까지였다.  

“무언가, 확 달라졌어요! 새 집 같아요!”

성옥이가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Y는 짐짓 무슨 소리야? 그런 표정으로 성옥을 바라보았다.  

“아 저 장미!”

성옥이가 감동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무슨 결심… 을 했어요?”

성옥이가 눈을 크게 뜨고 의구심과 불안감이 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성옥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Y는 모른 척했다. 그는 성옥이가 마시지 않겠다는 커피를 들고 소파에 가서 군드러지듯 주저앉는 성옥을 곁눈으로 보았다.

Y는 곧 커피가 든 머그잔 두 개를 들고 성옥의 곁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지요?”

성옥이가 조심스럽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응!”

그가 아이처럼 대답했다. 마치 이 한마디의 대답을 하기 위해 여태 기다린 듯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성옥은 반대였다. 그의 새로운 결심이 좋든 나쁘든 어느 쪽이라도 불안했다. 불안감이 스며드는 이유도 모른 채 성옥은 떨리고, 두렵기까지 했다.

“성옥아.”

그가 거의 1분이나 말없이 커피를 마시다가 성옥을 불렀다. 성옥이 네, 하고 낮게 대답했다.

“우리도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지. 이제부터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자. 그래야 우리들 인생에 미안하지… 않겠지?”

Y가 말했다. 아주 낮고 차분하고 따뜻하고 눅눅한 목소리였다. 순간 성옥은 어린아이처럼 그가 하는 말을 말끄러미 듣고 있다가 곧, 고개를 푹 꺾고 무릎에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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