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한 생각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강한 태풍이 연이어 한반도를 지나가던 8월 30일 저녁 강남의 일지아트홀.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은 무대 위 두 명의 여성 문화리더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KBS ‘개그콘서트’의 수장 서수민 PD와 KBS의 간판 황정민 아나운서가 들려준 삶과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이날 내린 폭우보다 더 강하게 청중의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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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효식 / 여성신문 사진기자 yesphoto@womennews.co.kr
“20대로 돌아간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냐”는 한 관객의 질문에 두 사람은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름대로 모범생으로 살아왔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보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자 또 다른 관객은 “두 분 다 정해진 길을 걸어서 성공의 모델이 되지 않았나. 나는 반대로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살아왔는데 요새 와서는 ‘왜 내가 한길로 못 갔을까’ 싶은 후회도 든다. 두 분이 살았던 길이 정석인데, 그저 아쉬움에 즐겨보길 권하는 것은 아니냐”는 뼈 있는 질문을 재차 던졌다. 황정민 아나운서는 “사실 나는 용기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지금은 다른 일은 할 수 없는 바보가 된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되는 대로 막 살라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질 수 있는 틀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사셨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서수민 PD도 “이 말도 정답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사회에서 교육받는 모든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초점에 맞춰져 있는 점이 문제라 생각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업을 얻는 것이 꿈은 아니지 않나. 이후에 어떤 일들을 해 나갈지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토크 콘서트 말미에는 대학가요제에서 금상을 수상한 실력파 인디 밴드인 ‘홍대입구’가 흥겨운 공연을 펼쳤다. 원모어찬스의 ‘널 생각해’, 김광석의 ‘서른즈음에’, 십센치의 ‘죽겠네’ 등의 히트곡과 함께 자작곡인 ‘먼 훗날’ 등을 연주해 큰 호응을 얻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여성문화네트워크가 주관, 여성신문사가 후원하는 토크 콘서트 ‘신나는 언니들’은 11월까지 매달 열릴 예정이다. 9월 말 열릴 3번째 공연에서는 ‘뮤지컬계 미다스의 손’이라 불리는 연출가 이지나씨와 실력파 뮤지컬 배우 김선영씨가 함께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서수민 피디 “쟤, 반은 남자야~ 머리도 짧게 자르고 욕 연습까지 해가며 여자가 아닌 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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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효식 / 여성신문 사진기자 yesphoto@womennews.co.kr
최근 연예인보다 더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서수민 PD는 남성 중심의 조직이었던 방송국에 입사해 최고의 예능 PD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털어놨다. 지금은 방송국에서 17년차 중고참 PD로 자리매김했지만, 당시만 해도 11년 만에 예능국에 입사한 여자 조연출로서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그는 “그때는 ‘쟤 반은 남자야’라는 말이 칭찬이었다. 머리도 짧게 자르고 욕 연습까지 해가며 여자가 아닌 체했다”고 고백했다.

서 PD가 이런 열등감을 극복하고 여성으로서의 장점과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개그콘서트의 수장을 맡으면서부터다. 그는 “개그맨들은 스스로의 열등감, 즉 단점을 잘 요리하고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경우 오히려 성공하더라. 그 가장 큰 예가 ‘네가지’ 코너다. 키 작다, 인기 없다, 뚱뚱하다, 촌스럽다는 콤플렉스를 가진 네 명의 주인공이 그 열등감을 사회를 향해 외치면서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다. 열등감을 드러내는 순간 나밖에 못하는 고유한 장점으로 바뀐 것”이라며 “이런 사실을 절감하고 나니 여자라는 정체성과 여성적 사고를 프로그램에도 대입하게 됐다. 모든 가족이 두루 모여 앉아 즐길 수 있는 ‘감사합니다’부터 ‘감수성’ 등의 코너가 나오게 된 이유”라고 전했다.

이날 객석에는 문화 콘텐츠 제작자를 꿈꾸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래서 서 PD에게는 PD의 자질이나 창의력의 원천, 창작의 방법 등을 묻는 질문이 쏟아졌다. 그는 “자기 안에 뭔가가 있는데 끌어내기 어렵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공감하며 “먼저 내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라. 콘텐츠를 통해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무엇인지 방향을 잘 잡고, 그것을 한 줄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명료하게 정리하라. 그 후에는 ‘욱하는’ 성질을 발휘해 끝까지 밀어붙이라”고 조언했다. 또 자신의 창의력의 원천은 노력이라는 말로 덧붙였다. 그는 “개그콘서트 프로그램을 맡고 나서는 퇴근 후 매일같이 새벽 2시까지 하루 네 편씩 시중의 모든 코미디 프로를 섭렵했다”며 “기발한 생각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소재를 내려면 머릿속에 무언가가 많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송 제작은 작업환경이 고되기로 유명하다. 10년 넘게 계속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서 PD는 “다소 오글거리는 답이 될 수 있겠지만, 내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개그콘서트 표를 구하려고 청탁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원칙대로 신청하시라’고 거절할 때면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런 짜릿함이 좋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다시 “반대로 불치병에 걸린 아이가 개그콘서트를 꼭 보고 싶어 했을 때, 특별석을 제공한 적도 있다. 그 아이가 하늘나라로 가고 난 뒤 아이 어머니에게서 좋은 추억 만들어줘 고맙다는 연락 받았을 때 ‘이 일을 그만둘 수 없겠구나’ 하는 보람을 느꼈다”고 전했다.

황정민 아나운서 “잘하려는 생각 버리니 자유로워지고 내 본연의 모습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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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효식 / 여성신문 사진기자 yesphoto@womennews.co.kr
황정민 아나운서는 취업과 진로가 고민인 대학생들을 위한 실질적인 조언 위주로 강연을 펼쳤다.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소통.

그는 “처음 입사했을 때는 PD나 작가 등 스태프와 회의할 때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소통이 잘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내 입장에서일 뿐 프로그램이나 조직을 위한 일은 아니더라”며 “아나운서가 방송국의 다른 직업군들에 비해 빛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직업처럼 보이지만, 사실 개인의 캐릭터보다는 타인과의 협업이 훨씬 중요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시행착오를 거치기는 했지만, 조직사회에서 적응할 수 있었던 비결은 대학 시절 학보사에서 조직원들과의 협동을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대학을 졸업하기 전 꼭  결속력이 강한 서클에서 자기를 단련해 보시기를 권한다”고 조언했다.

황 아나운서는 소통에 실패해 실수를 했던 아픈 경험과 그것을 극복한 이야기도 진솔히 털어놨다. 2002년 뉴스 프로그램에서 효순·미선 사건에 대한 대학생들의 시위를 보도하던 중 “부끄럽습니다”라는 발언을 해 앵커석에서 하차했던 때의 이야기다. 그는 “당시 쇠사슬로 온몸을 묶고 길로 나선 학생들을 보며 ‘언론인으로서, 선배로서 나는 무얼 했나’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이 부끄럽다는 뜻에서 한 말인데 한 인터넷 기자가 악의적으로 보도해 일이 일파만파 커졌다. 사람들이 내 뜻을 모른다 생각해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기만 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내가 소통의 방법이 부족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그때는 내가 다시 방송을 하게 될 수 있을지, 불안한 것 투성이였다. 그러나 어떤 절망의 순간도 다 지나가는 것이더라. 앞으로 일하며 힘든 순간들이 있을 텐데,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뼈아프게 반성은 하되,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긍정의 힘은 남겨 두시라”고 전했다.

그가 1998년부터 14년 넘게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 ‘FM대행진’은 최근 5000회를 넘기며 KBS 라디오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시청률도 여전히 방송국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방송이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황 아나운서는 “이숙영, 최은경 등 전임 진행자들보다 잘하기 쉽지 않더라. 유학 간 후배 최은경이 돌아오면 다시 진행자 자리를 넘겨줘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며 “당시에는 무엇 하나 실수라도 하면 더욱 주눅 들곤 했다. 잘하려는 생각을 버리니 자유로워지고 내 본연의 모습이 나타나더라”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요즘에는 실수를 해서 청취자가 ‘누님, 또 한 건 하셨군요’ 이런 문자를 보내도, ‘제가 무슨 실수를 했죠’ 하고 받아칠 정도로 편안해졌다. 그래서 오히려 청취자들도 더 편하게 들으시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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