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꾼으로 (5)

 

 

Y는 눈을 뜨며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분이었다. 짧지만 달고 깊은 낮잠을 자고 난 뒤의 말로 할 수 없는 상쾌함에 몸은 가벼웠다. 그는 누운 채 커튼이 열린 창의 햇살과 창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거리의 소음을 들었다. 빛은 화사하고 소음은 삶 같아서 반가웠다.

그는 이런 기분을 간직하려는 듯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눈길이 가면서 보게 된 벽시계의 시간이 그에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일깨웠다.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간이라면 그는 사무실에 있어야 했다. 일요일인가? 생각해봤다. 토요일이었다.

그는 현장을 보존해야 할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살폈다. 침대 위에 벌린 채 놓인 다리, 베개를 베지 않은 머리, 입고 있던 반바지와 배꼽을 드러내고 가슴까지 말려 올라간 셔츠. 그의 손이 배를 더듬는 동안 순간 눈이 깊게 감겼다가 반짝 떠졌다. 그는 두 다리를 직각으로 추켜세우는가 싶더니 머리 뒤로 떨어뜨렸다가 추켜들며 반동으로 일어섰다. 아, 그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숨 한 번 쉴 동안 그렇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안을 살폈다. 눈엔 벅찬 미소가 가득, 입엔 터지기 직전의 웃음이 넘실거렸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뚜껑이 열린 채 암전된 노트북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랬지. 그는 생각했다. 가리봉시장인가? 건대오거리라고 했던가? 양 꼬치구이를 검색하려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참을 수 없이 밀려오는 잠에 딱 10분만 자자, 그렇게 생각하고 누웠던 것까지.

그는 두 손을 추켜들고 머리 위에서 맞잡아 몸을 늘였다. 양쪽으로, 앞뒤로도 잡아당기고 늘이고 하였다. 시원하고 가벼웠다. 이렇게 상큼한 기분인 게 언제였던가. 그는 웃음을 참기라도 하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 화장실로 갔다. 오줌은 보가 터지기라도 한 듯 하염없이 좔좔 흘렀다. 그러면서 그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썸 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 위로 오르는 길이 있네. 그곳엔 언젠가 자장가를 듣던 곳이 있다네.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 푸른 하늘이 있는 곳. 감히 꿈도 꾸지 못한 꿈들이 이루어지는 곳이 있네….

오줌을 누고 바지춤을 올리고 거울 앞에 섰다가 그는 싱긋 웃었다. 거울 속에서 행복한 사내 하나가 그를 보고 웃었기 때문이다. 머리는 더부룩하고 입가엔 흐릿하지만 침 자국이 눈에 띄는 남자. 잘 알 것 같은 남자에게 그는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웃어 보였다. 썸 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 어쩌면 그는 오늘 하루 종일 이 노래를 흥얼거릴지 몰랐다. 더러 그럴 때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기 시작한 노래를 온종일 그렇게 하는 날. 오늘이 그랬다.

그는 손바닥으로 침이 묻은 입술가를 문지르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웃음기가 얼굴에서 흩어지지 않았다. 커피 알을 커터에 넣고 전원을 누르며 마른 콩이 갈리는 동안 그는 성옥을 생각했다. 새벽 6시나 되어야 일이 끝난다고 했지,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드립을 하는 동안 그는 성옥이와 함께 마시는 상상을 했다. 머그잔에 커피를 가득 채워 들고 소파에 깊게 앉아 다리를 탁자에 얹었다. 평화롭고 행복했다. 행복감은 어느 순간 느낌으로 오곤 했다.

엄마, 사실 나 여자 있어요.

Y는 문득 이런 말을 상상했다. 그리고 웃었다. 하지만 이내 웃음기가 사그라졌다. 어머니의 다음 말이 귀에 쟁쟁했다. 뭐하는 여자, 부모가 누구, 학교는 어디 등등.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밀려드는 우울을 떨쳐내듯 다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머그잔이 텅 빌 때까지도 그랬다. 무지개 너머, 언젠가 자장가를 듣던 곳, 무지개 너머 감히 꿈으로도 꿀 수 없는 꿈이 이루어지는 곳에 대한 노래. 황홀과 희망과 절망과 슬픔이 한꺼번에 배어나오려 했다.

그는 휴대폰을 들었다. 전원을 켰다. 초기 화면이 열리는 동안 그는 시간을 가늠해봤다. 성옥이는, 아직 자야 할 시간이라고 굳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그는 전원을 켜 둔 채 휴대폰을 책상에 얹고 청소기를 들었다. 그러나 청소기의 소음이 떠오르자 진동으로 해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청소기를 돌렸다.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현관도 밀었다. 청소기에 치인 현관의 책들이 와르르 무너져 흩어졌다. 그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버린다고 내다놓은 책들. 이제 그런 것들과 결별하겠다고 비장했던 순간이 기억났다. 그는 책을 한권 한권 집어서 가지런히 모아들고 책상 위에 얹었다. 청소기를 돌린 뒤에 그는 빵을 구웠다. 팬에 버터를 녹여 식빵을 굽고 치즈를 갈아 얹어 천천히 씹어 먹었다.

한쪽을 반이나 먹었을까? 그는 갑자기 이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졌다. 누군가 보고 있다면 창피할 것 같았다. 누군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국 빵 한 쪽을 다 먹지 못하고 샤워를 했다. 다른 때와 달리 머리에 샴푸를 두 번이나 했다. 손톱을 세워 박박 긁었다. 사타구니도 샅샅이 씻었다. 옷을 갈아입었다.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언젠가 슬며시 노래가 사라졌다. 엄마의 대꾸를 상상한 뒤였다.

시간을 보았다. 2시가 넘었고 3시가 되려면 한참이나 있어야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잊고 있던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아직 자야 해. 밤을 새웠을 텐데. 그는 속으로 말하고 인터넷을 열었다. 가리봉이랬지, 생각하며 양 꼬치구이를 검색했다. 카페와 블로그는 꽤 많았다. 조선족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든 양 꼬치구이가 있다고 했다. 시장은 70년대 모습 그대로인 채 낡기만 했다고 누가 썼다. 사진으로 보이는 양 꼬치구이는 그저 그랬다. 이탈리안 식당에서 양갈비를 먹어본 적은 있지만 꼬치구이는 경험이 없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카페와 블로그를 돌아다니며 검색했다. 그러다가 시간 따위는 깜빡 잊고 휴대폰의 단축 번호를 눌렀다. 맘에 드는 식당을 발견한 것이었다.

“안녕하세요오!”

성옥의 음성은 그의 염려와는 달리 쌩쌩했다.

“양 꼬치 먹어야지!”

그가 나른하게 말했다.

“안 돼요.”

“왜?”

“친구가 아파서 문병 왔는데 오늘은 하루 종일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잠은 안 자고?”

“친구가 심각해요. … 암이래요.”

성옥이가 한껏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순간 그는 부끄러웠다. 

“북한 친구야?”

“네. 언젠가 제가 말씀드린 것 같아요. 혜교라고.”

“그래. 생각 나.”

그는 거짓말을 했다. 전혀 생각나지 않는 이름이었다. 탤런트 송혜교라면 몰라도.

갑자기 성옥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지금 의사 선생님이 들어왔다, 나중에 연락드리겠다….

성옥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 Y에게 이런 적은 거의 없었다. 누구라도 성옥은 먼저 전화를 끊지 못했다. 하지만 병실은 심각했다. 한동안 이모와 실랑이를 벌인 끝에 혜교에게 병의 상태를 알리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폐암이 말기에 이르렀고 여러 군데로 전이되어 손을 쓸 수 없다, 길면 반년은 살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기적은 있다, 기적을 바라자, 의사는 비장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혜교는 어느 때보다 눈빛이 형형했고 창백한 얼굴은 비현실적으로 고혹적이었다. 거기다 가끔 미소를 지었다. 우는 건 이모와 성옥이었다. 혜교는 두 사람을 위로했다. 울지 마라, 오래 살았다, 두만강에서 죽을 뻔했다. 여기까지 와서 호강해 봤다. 후회 없다. 또랑또랑한 말소리로 말했다. 내숭이 끓는 평소의 혜교와 달랐다.

이모는 성옥에게 혜교를 부탁하고 먼저 돌아갔다. 온다던 남혁은 오지 않았다. 경상도 진해에 연수를 갔는데 오는 길에 들른다고 했었다.

“통일을 봐야지. 통일 되면 제일 먼저 고향에 가자고 그랬잖아….”

성옥은 이렇게 말하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혜교가 꺼풀 얇은 입술에 아지랑이 같은 미소를 머금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가늘고 창백했다. 성옥의 손가락 힘이 너무 세서 혜교의 손가락이 나뭇가지처럼 꺾일 것 같았다. 혜교가 얼굴을 찡그렸다.

“혜교야. 생각해 봐라. 너 두만강 몇 번 넘었다고 했니? 세 번?”

혜교가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였다.

“우린 잘 살아야 해. 살아서 통일을 봐야 해!”

성옥이가 애끊게 말했다. 이때 빛나던 혜교의 눈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혜교가 눈을 감았다. 눈시울로 눈물이 아롱졌다. 성옥은 입술을 깨물고 울었다.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나아… 가서 죽을래….”

혜교가 신음처럼 말하는 소리를 성옥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어서 성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곧 이해했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그 말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혜교의 흐릿하고도 분명한 미소를 본 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바보! 성옥은 혜교의 가느다란 손을 잡았다. 말인들 못할까, 꿈인들 못 꿀까. 성옥은 고개를 한동안 끄덕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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