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업계의 간판 스타 안철수 사장은 너무 심하게 예의 바르고 너무 과도하게 겸손하다. 늘 양보하고 늘 순응한다… 내가 알고 있는 인간 본성으로는 위장을 하지 않고는 그러한 행동이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위선 여부를 탐색했다”(최보식의 ‘우리시대 사람 산책’ 중).

2000년대 초반 의대 출신 컴퓨터 백신 전문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안철수를 인터뷰한 기자의 후일담이다. 그런데, 이 기자가 안철수에게 진정 매력을 느낀 부분은 뜻밖이었다. 인터뷰를 한 후 다시 만나게 된 안철수는 그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도 있다”는 고백을 한 부분에서다. ‘착한 남자’ 콤플렉스도 있는 이 ‘예외적’인 면에 그는 인간적으로 호감을 느꼈다고 한다.

대중이 느끼는 안철수의 매력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탁월함 뒤에 가려진 지극히 인간적으로 약한, 그러나 선하고자 하는 모습.

어머니의 겸양과 아버지의 봉사정신, 그리고 독서

언론에 비치는 안철수의 겸양 이면엔 어머니 박귀남씨의 절대적인 그림자가 있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당시로는 보기 드문 인텔리였던 어머니는 “깨어 있는 모든 시간에 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라”고 말하곤 했고 어머니의 말씀은 그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고 한다. 어머니와 얽힌 유명한 일화는 택시기사를 감탄시킨 아들에 대한 존댓말. 어머니가 택시를 잡아주면서 “다녀오세요”라고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택시기사가 “형수님이세요?”라고 물을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인 범천의원 안영모 원장은 서울대 의대 출신으로, 60년대 초반 개업해 올해로 개원 50주년을 맞았으나 아들에 대한 뜨거운 정치적 관심 때문에 현재는 병원 문을 닫은 상태다. 안철수에겐 너무나 아픈 부분이다. 아버지 안 원장이 자리를 잡은 부산 진구 범천4동은 빈민 지역. 안 원장은 의료보험이 도입되기 전부터 그의 가난한 환자들에게 시내 병원의 절반 수준의 진료비를 받는가 하면 때론 무료 치료도 해주곤 했다. 처음에 하루 20~30명에 불과하던 환자들은 어느새 하루 150여 명으로 늘어났다고. 안 원장의 둘째 아들은 한의사, 사위는 치과의사로 의료인 가족을 이루고 있다.

아버지 안 원장은 아들에게 실질적인 삶의 교훈 두 가지를 선사해줬다. 오십이 다 돼 새로이 가정의학 공부를 시작, 전문의 자격증을 땀으로써 도전은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줬고, 일본까지 가서 몸소 책을 구해오는 등 독서에 대한 열정을 물려줬다.

안철수는 흔히 추측하는 대로 처음부터 ‘엄친아’는 아니었다.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조용히 독서를 하거나 마당에서 토끼나 닭을 돌보곤 했고, 때론 집안에 있는 기계를 요리조리 분해하곤 했다. 한 살 일찍 입학한 초등학교 때는 키가 하도 작아 맨 앞줄에 서곤 해 “앞으로 나란히!” 구령에 맞춰 팔 한번 뻗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성적도 신통치 않아 성적표엔 ‘수’가 거의 없었다. 중학교 때 최고 성적은 2,3학년 무렵 반에서 2,3등 한 것이었지만 전교 1등을 거머쥔 것은 대학 입시가 코앞에 닥친 고3 때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그는 후에 “만일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더라면 딴 생각 없이 의사가 돼 평생 그 길을 갔을 것”이라며 초등학교 시절 공부보다는 책에 더 흥미를 느낀 것이 인생 자체를 넓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회고한다. 

노벨의학상을 꿈꾸다 정보통신업계 일인자로 급선회

초등학교 때 진공관 라디오를 만들고 중학교 때 회로도만 보고 트랜지스터를 조립했을 정도로 손재주가 뛰어났던 안철수의 꿈은 원래는 33세 안에 노벨의학상을 타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학원 과정에서 심장의 전기신호를 분석하는 분야를 전공해야 하는 관계로 컴퓨터 공부에 입문했고, 1988년 의대 박사과정 중 극적인 전환기를 맡게 됐다. 디스켓이 브레인 바이러스에 감염돼 이를 퇴치할 백신 프로그램을 고안하게 됐고, 이후 7년간 개인 사용자에 한해 이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하게 된다. 이윽고 1995년 한 벤처업체의 지원을 받아 바이러스 백신 회사를 세워 이것을 현재의 안랩(안철수연구소)으로 발전시키면서 국내 정보통신업계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변별력이 없는 한 패기 있는 젊은이의 성공 스토리다. 지금의 안풍을 있게 한 것은 성공한 뒤의 그의 행보다. 그는 장외시가 60억여 원에 이르던 자신의 개인주식 8만 주를 직원 120명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는 나눔경영을 실천하는가 하면(반면 당시에도 그는 전세에 자가용 운전기사의 채용을 망설이는 상황이었다), 회사 총 매출액이 10억원일 당시 외국 기업의 1000만 달러 인수 제의를 과감히 거절하는 등 공익적 기업가 이미지로 대중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최근엔 자신의 재산 절반을 기꺼이 내놓고 공익재단을 출범시키기에 이른다.

이처럼 과감히 사적 이익을 포기할 수 있었던 데는 아내 김미경 서울 의대 교수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아내와 나는 돈에 대한 가치관에서 행복할 정도로 일치했다”며 아내를 가리켜 “나와 같은 곳을 보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안철수보다 1년 후배인 아내 김미경 교수는 안랩의 전신인 안철수바이러스연구소가 태동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안철수가 창업을 결심하게 된 계기도 아내의 월급으로 생활하는 데 대한 미안함이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군의관을 마친 후 복직이 안 돼 10개월간 실업자로 지내야 했다.

연구소는 신혼집을 사무실로 해서 태어났다. 안철수는 월급을 포기했고, 나머지 직원들의 월급이 모자라면 아내 김 교수의 월급으로 메우곤 했다. 후에 직원이 7명으로 늘어나면서 비로소 이 신혼집 사무실을 탈출하게 된다.

 

안철수 지지율의 기폭제가 된 TV 예능 프로그램 ‘힐링 캠프’에 공개된 그의 아내와 딸 사진.
안철수 지지율의 기폭제가 된 TV 예능 프로그램 ‘힐링 캠프’에 공개된 그의 아내와 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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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상당히 닮은꼴이다. 안철수가 잘 나가던 의사의 길에서 컴퓨터 회사 CEO로 급선회하고, 이어서 마흔이 넘은 나이에 경영학 석사(MBA)를 따기 위해 돌연 미국 유학행을 택한 것처럼 그의 아내 역시 커리어를 위한 도전을 끊임없이 감행했다. 15년 간 병리학 전문의로 이름을 날리던 김 교수는 의약분업으로 인한 의사들의 파업 사태를 보면서 법학을 전공할 것을 결심, 마흔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 2개 주의 변호사 자격증까지 땄다. 귀국 후엔 의학과 법학을 접합하는 학제 간 융합 시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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