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처녀 가장’에서 ‘선거의 여왕’으로 등극…‘유신 공주’는 떨치기 힘든 숙명
오늘의 박근혜는 ‘청와대 생활 15년- 은둔 18년- 정치인생 15년’의 결정체

 

어느 해 명절 청와대에서 온 가족이 기념 촬영을 했다. 박근혜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멘토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군사정권 퇴각 이후 폄하된 아버지의 업적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정치 동력이기도 하다.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what is the generic for bystolic bystolic coupon 2013 bystolic coupon 2013
어느 해 명절 청와대에서 온 가족이 기념 촬영을 했다. 박근혜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멘토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군사정권 퇴각 이후 폄하된 아버지의 업적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정치 동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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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새누리당 예비 대선후보의 ‘국민행복’ 캠프 제공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2004년 3월 2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박근혜의 연설).

지금까지도 명연설로 회자되는 박근혜의 이 한마디는 전당대회장에 모인 대의원들의 가슴에 직통으로 파고들었고, 그가 39년 만에 주요 정당의 여성 당 대표로 선출되는 영광을 안겨주었다(첫 여성 총재는 1965년 민주당의 박순천 여사). ‘차떼기’ 당이란 조롱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탄핵 정국에서 침몰해가던 한나라당이 이후 총선에서 121석을 건져내며 부활하기까지 박근혜의 투혼과 열정, 헌신이 주효했다는 것은 당을 떠나 누구도 부인 못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다수의 정치학자들도 이 4·15 총선을 기점으로 정치인 박근혜의 지도자로서의 가능성이 처음으로 검증되고, 홀로서기가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11세부터 정치 훈련, 정계 입문 5년 만에 대선주자로 초고속 성장

 

2004년 한나라당 당 대표로 선출돼 당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그는 39년 만에 주요 정당의 당 대표로 여성이 선출됐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이후 올해 총선 국면에선 여야 모두 여성 당 대표 체제를 맞는 유례없는 상황이 전개됐다. ⓒ여성신문DB
2004년 한나라당 당 대표로 선출돼 당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그는 39년 만에 주요 정당의 당 대표로 여성이 선출됐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이후 올해 총선 국면에선 여야 모두 여성 당 대표 체제를 맞는 유례없는 상황이 전개됐다. ⓒ여성신문DB
‘선거 여왕’ ‘구원투수’ 이미지를 굳힌 박근혜의 이 성공 사례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박근혜 자신의 발언으로 자신을 규정한 이미지가 그와 당을 넘어 대중에게 깊이 각인된 박근혜의 일반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사의 격동기에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총탄으로 잃고 청와대를 나와 ‘평민’으로 험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비운의 처녀 가장에 대한 연민과 함께 위기를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박정희 시대의 향수가 겹쳐 시너지 효과를 내며 자연스레 형성됐다. 당시 최병렬 대표도 “우리 당에서 돈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박근혜 의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박근혜의 이미지를 높이 샀다”며 그를 당 대표로 민 배경을 토로했다.

알려져 있듯이, 박근혜의 정식 정치 입문은 1997년 대선을 8일 앞둔 12월 10일 한나라당에 전격 입당하면서 당시 당 대선후보였던 이회창을 지지하며 시작됐다. 이어서 이듬해 4월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 출마, 15대 국회에 진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애’의 신비한 이미지에 싸여 있던 그가 19대까지 내리 5선을 하며 1998년 부총재, 2004년 당 대표를 거쳐 당의 위기 상황마다 발군의 성과 속에 2002년부터 대선주자로 급부상하는 초고속 성장을 하리라 예견한 이는 별로 없었다.

여기서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이 11세에 시작된 청와대 생활,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 정치 교육이다. 이 점이 바로 다른 어떤 정치인들도 쉽게 가질 수 없는 특장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나라당 실세로 박근혜의 정계 입문을 도왔다고 알려진 허주 김윤환은 2001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경륜이 아주 중요하다”며 박근혜를 주목했다. 그는 “총리를 아무리 한들 (5년) 퍼스트레이디를 했던 것에 비하면 견줄 것이 못 된다”며 “권력의 핵심에서 권력이란 것을 몸으로 배운 사람이 박근혜”라 단언한다. 김은경 세종리더십개발원장(국민대 정치대학원 초빙교수)도 “리더십은 누구에게나 잠재해 있다. 다만 어떤 경험을 만나 어떻게 형성되느냐가 매우 중요한데, 이 면에서 박근혜는 인생 자체가 정치 훈련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며 “바로 이 지점에서 뛰어난 위기능력을 체득했을 것”이라 추론한다(아버지의 암살 소식을 처음 접하고 나온 그의 첫 마디  “전방은 괜찮나요?”라든지 2006년 지방선거 유세 중 피습을 당해 수술을 받고 깨어난 직후 “대전은요?”라고 물었다는 일화 역시 그의 신화를 강화시키고 있다). 박근혜 자신도 “아버지의 정치철학이나 국정 운영 철학, 안보관, 세계관에 대해 밥상머리에서도, 또 차를 타고 가면서도 생활에서 항상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도 어머니가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 살았던) 신당동 집으로 돌아갈 때를 생각해 특권의식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음을 술회했다. 그는 청와대 생활 15년 내내 ‘나는 왕족이 아니라 임기가 정해진 대통령의 딸일 뿐’이라고 늘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권력의 부침을 이미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체득했다는 말이다. 박근혜의 홈페이지에서도 그의 경력은 의미심장하게도 ‘1974~1979 퍼스트레이디 대리’로 시작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 행사가 정점에 치달은 시기다.

“이승만~노태우 정권의 지역감정·색깔공세·제도언론의 수혜자”

여기에 청와대를 나와 은둔한 18년의 세월도 더해진다. 어찌 보면 이 시기를 통해 현재 박근혜의 품성 가운데 많은 부분이 형성됐다는 추측도 나온다. 그의 일기를 집중 분석해 ‘박근혜 53년 인생 이야기-나는 독신을 꿈꾸지 않았다’를 쓴 언론인 출신의 천영식씨는 “박근혜는 15년 청와대 생활에서 (아버지로 인해) 삶의 토대를 쌓았고, 은둔생활에서 (극복과 개척을 통해) 자기를 찾았다”고 분석한다. 박정희 격하 운동, 믿었던 사람들의 연이은 등 돌림, 이윽고 1990년 육영재단을 둘러싸고 벌어진 동생과의 분쟁에 이르기까지 큰 타격을 받았던 그 시절의 박근혜를 움직인 것은, 그를 지켜본 한 지인의 말처럼 “혼자 버려졌다는 외로움에서 비롯된 공포감, 배신감에서 형성된 미움”으로, 이것이 그를 더욱더 고집스럽고 강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에 대한 폄하가 거세질수록 아버지를 지켜내야 한다는 열망과 그리움은 강해져 유신에 대한 찬양(“유신 없이는 아마도 공산당의 밥이 되었을지 모른다” 1981.10.28)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이 10년의 시기를 지나 1990년대에 들어서야 박근혜는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천씨는 한 정신과 전문의의 분석을 빌려 완벽주의 성향의 박근혜에 대해 “세상이 바뀌었으니 아버지의 단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더 버거웠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선 자신의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하니 아버지보다 더 나은 정치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정치를 그만두고 내가 좋아하는 산책을 하기 위해선 나라가 안정돼야 하지 않나요?”란 말을 스스럼없이 꺼낼 정도로 절제된, 그러나 무섭도록 강한 권력 의지를 갖추게 됐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급성장의 이유를 이들 드러나는 요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언론인 출신의 손석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은 저서 ‘왜곡된 반사 또는 부풀려진 신화-박근혜의 거울’에서 박근혜의 이미지가 표방하는 것은 “높은 경제성장을 일궈내는 성장정치, 청렴하고 서민들을 품어가는 서민정치, 공약은 반드시 실현한다는 원칙정치”라며 이 세 가지는 국민 대다수가 정치인들에게 기대하는 덕목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그 이면엔 한국 정치의 또 다른 비밀이 숨어 있다. 손 이사장이 지적하는 것은 바로 지역감정, 색깔공세 그리고 제도언론. 이는 또한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40여 년에 걸친 정치적 자산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박근혜는 보수 군사정권의 최대 수혜자일 수 있다. 반면, 민주화 투쟁에 힘입어 수립된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 최근의 통합진보당 사태에 이르기까지 진보 정치세력의 여러 과오는 박근혜에게 오히려 반사이익을 안겨주었다. 시간적으로도 40여 년과 15년은 비교 불가다. 그래서 손 이사장은 “박근혜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를 단순히 박정희와 육영수의 딸로만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며 “박근혜 신화는 정치적 형성물이기에 그를 거울에 비추면 한국 정치의 모든 게 보인다”고 단언한다.

때문에 지난 16일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군사쿠데타에 대해 “돌아가신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로선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5·16이 그 초석을 만들었다고 볼 때 (아버지가) 바른 판단을 내리셨다고 본다”는 그의 발언은 이제까지의 그의 정치적 성장 배경을 볼 때 지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지난 2007년 대선 국면에서 5·16쿠데타를 ‘구국혁명’으로 규정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5·16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 역사관 또다시 시험대에

어쨌든 이번 박근혜의 5·16쿠데타에 대한 역사 인식은 연말 대선까지 직·간접으로 파장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김종인 박근혜 캠프 공동 선대위원장도 한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박 전 대통령을 (육신의) 아버지가 아닌 전직 대통령으로 공과를 판단해야 한다”고 아쉬움을 피력했다.

이번 파란에 대한 박근혜의 최대 방어 논리는 아버지 시대는 (50여 년 후의) 지금의 시대와 엄연히 다르다는 것. 그래서 자신은 “완전히 달라진 시대에 맞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박근혜의 딜레마가 미칠 파장을 예상이라도 하듯 지난 6월 말 부산 도심에 한 팝아트 작가의 일명 ‘박근혜 독사과’ 포스터가 나붙은 사건은 의미심장하다. 박근혜가 여타 여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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