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삶 바꿀 ‘여성’ 대통령, 과연 가능할까

 

올해 1월 여성신문사의 신년하례식에 참석한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김정숙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등 여성계 인사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전문가들은 여성 네트워킹과 스킨십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여성신문DB
올해 1월 여성신문사의 신년하례식에 참석한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김정숙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등 여성계 인사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전문가들은 여성 네트워킹과 스킨십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여성신문DB
박근혜는 진정 여성을 대변할 수 있는 성인지적 정치 리더일까.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박근혜의 정치 이력은 특히 민주화 운동과 궤를 같이 해온 여성운동계엔 매우 불편한 지점이다. 한 여성 활동가는 유신에 대한 깊은 자성이 없는 박근혜임에도 불구하고 “대선 국면에서 그의 여성성을 빗댄 성차별적 발언이나 행태가 횡행할 텐데 여성계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매우 고민된다”고 토로한다. 대표적 진보 여성단체인 한국여성단체연합은 20일을 전후해 “박근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내부 차원의 다양한 의견과 논의를 거쳐 8월 말쯤 입장 정리를 할 계획이다. 그러나 한 실무자의 말대로 결론이 날지는 불투명하다.

2007년 대처에서 2012년 메르켈로… 롤 모델의 유연한 이동

정작 박근혜 본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박근혜의 ‘여성’ 정체성,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성인지적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그가 잠재적 대선후보로 부각되기 시작한 2002년에 발화되면서 여성계의 대표적 정치 딜레마로 자리 잡았다. 당시 진보적 여성 언론인이 (남성 중심 가부장 정치권에서 희귀 동물로 치부되는 여성정치의 척박한 현실 때문에라도 여성인) “박근혜를 찍는 게 진보”라고 주장하면서 찬반 논란이 벌어졌다. 박근혜를 둘러싼 이후 논란도 본질은 별반 다르지 않다. 단, 박근혜를 지지하는 여성들의 입장이 앞의 계몽적이고 낭만적이기까지 한 이유보다는 직·간접적 오랜 그의 국정 경험에 주로 기인하지만(2007년 경선 국면에서 김용숙 아줌마는 나라의 기둥 대표, 김령자 한국여성정치연맹 부총재, 은방희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명예회장 등 50여 명의 여성계 인사들은 “박 후보는 일찍이 청와대에서 경제 도약 수업을 받은 준비된 대통령 후보”라며 공개 지지를 표했다).

이제 또다시 대선 국면, 박근혜는 “여성이 정치세력화해야 하는 이유는 (남성 중심의) 현 정치의 판을 바꾸고, 또 여성의 삶을 바꾸자는 건데 박근혜가 그런 의지가 있는 여성인가”라는 해묵은 회의에 답해야 한다.

일단 이번 대선에서 후자에 대한 가시적 변화는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롤 모델의 우선순위 ‘이동’이다. 2007년 경선 당시 롤 모델로 내세웠던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마거릿 대처보다는 유럽발 재정 위기의 해결사로 나선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메르켈의 벤치마킹에 주력하는 분위기다. 시대적으로도 영국의 병폐인 파업과 노조문제에 단호히 대응, 영국 경제를 부흥시킨 완고한 신자유주의자 대처처럼 2007년 당시 (세금과 정부 규모를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는) ‘줄·푸·세’ 전략으로 한국의 고질병을 고치자는 주장이 호응을 받았던 사회 분위기와 지금은 많이 다르다. 복지정책, 금융 규제, 온실가스 감축 등 급진적인 좌파 의제를 수용하면서도 집권 1년 만에 실업률을 한 자릿수에 묶어놓고 연임에도 성공한 ‘진화한’ 우파 메르켈의 벤치마킹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선 더 효과적일 것이다.

“‘여성’ 정치인에 대한 특혜 거부는 내 정치적 신념”

김종인 캠프 공동 선대위원장이 메르켈을 롤 모델로 적극 제시했다는 후문이지만 이미 2007년부터 박근혜는 대처에 이은 롤 모델로 직접 만나 소통했던 메르켈을 생각해왔다. 비슷한 연배에 이공계 출신(박근혜는 서강대 전자공학과, 메르켈은 라이프치히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인 데다가 야당 대표를 거쳐 정치 입문 15년 만에 여성 최초로 국가 최고 수반에 올랐거나 그 길에 근접해 있는 등 유사점이 상당하다는 것도 이점이다. ‘동베를린의 대처’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 메르켈은 ‘경제’를 내세워 선거에 승리했지만 여성문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여성의 일·가정 양립을 적극 지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여성·가족정책이란 소신도 박근혜와 닮아 있다. 단, 메르켈의 경우 자신의 주요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강력한 여성 네트워크”를 꼽을 정도로 여성 연대를 중요시한 반면 박근혜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 많다.

박근혜의 ‘여성’ 정치인으로서의 깊은 자각은 2000년 전당대회에서 여성 지명직인 부총재 특혜를 스스로 거부하면서 겪은 정치적 논란 속에서 싹텄다. 그가 자서전은 물론 여러 인터뷰에서 반복해 강조해왔듯이 “‘여성 정치인’으로 보호받고 특혜를 누리며, 여성 몫으로 만들어 놓은 자리에 임명되는 것은 정치적 신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부총재라도 선출직 총재와 지명직 부총재는 말의 힘이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고 “소신 있게 내 목소리를 내길” 갈구했다. 선거 과정 중 “박근혜는 안 찍어도 여성 몫의 부총재로 임명될 것이니 꼭 필요한 사람을 찍어달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여성 우대정책이 오히려 여성에게 장애가 되는 딜레마를 체감하기도 했다. 그는 후에 “여성 지도부는 들러리”라는 당시의 금기에 정면 도전한 것이 이후 김영선·전여옥 의원 등이 자력으로 최고위원에 오른 한 계기가 됐다며 “언젠가는 선출직 지도부의 반 이상이 여성으로 차는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하게 됐다”고 술회한다. 여성 정치 진출에 대한 그의 이러한 인식은 여성할당제나 경선 시 여성가산점제, 사고 지구당에 여성우선공천 등 한시적 조치는 수용해도 여성전용선거구제, 여성각료할당제 등의 좀 더 적극적이고 급진적인 방안엔 거부감을 가지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지난해 신묘년을 맞아 참석한 대구시당 여성정책 아카데미 신년행사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토끼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남이 낸 길을 가는 것보다 자신이 만든 길로만 다니는 동물”이라며 “여성 정치를 꿈꾸시는 여러분의 길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는 당부를 하기도 했다.

‘여성’과 관련해 그의 여성적 감성이 반영된 대표적 사례는 2004년 7월 당 대표 취임 초기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사에 어린이집 설치를 이뤄낸 것이다. 야근으로 아이 돌보미를 다급히 찾는 한 여성 당직자의 전화가 도화선이 됐다. 난색을 표하는 당 관계자들에게 그는 “어린이집 하나 없는 정당에서 무슨 보육정책을 논하느냐”고 일갈했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이 육아와 보육의 부담에서 해방되면 당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것을 체감했다고 한다. 인권침해 논란에도 끄떡 않고 그가 주도해 통과시켜 2008년부터 시행 중인 성폭행범 위치추적을 위한 일명 전자발찌법도 빼놓을 수 없다.

참고로 2007년 여성신문이 주최한 대선후보 초청 심포지엄에서 박근혜가 내놓은 주요 여성 공약은 5년 내 여성일자리 150만 개 창출, 만3~5세 어린이집·유치원 전액 무료, 분유 등 육아용품 부가가치세 면제, 출퇴근·야간시간대까지 보육시간 연장 등이다.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이 당 대표가 됐을 당시에도, 지금 유력 대선주자로 자리를 굳혔음에도 우리 당 여성들은 흥분하지 않는다. 그가 여성이라고 해서 당내 여성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곤 누구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당 여성들은 물론 정치권과 언론조차도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의 여성성을 굳이 부각하지 않는다. 이 같은 둔감함이 신기할 법도 하지만 박근혜는 여성 정치인들 중 유일하게 ‘여성’이란 수식어가 좀체 붙지 않는 정치인이다. 한 여성 정치학자는 “그동안의 박근혜의 행보에서 여성과 관련된 사안이라고 다른 남성 의원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을 찾기는 어렵다”며 “그가 여성이기에 성인지적 정책에서 뭔가를 기대한다면 얻을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고로 ‘여성’에서 성인지성을 기대한다면 그를 찍을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단정한다.

정치변혁 갈구한다면 ‘여성’ 정체성 강화하길

과연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박근혜에게 여성이 얻을 이득은 그토록 없는가.

김은경 국민대 정치대학원 초빙교수는 박근혜의 간접적 후광 효과에 주목한다. “비록 박근혜의 승리를 놓고 ‘여풍’이란 표현은 할 수 없겠지만, 그의 주요 지지층이 50대 이상의 보수적인 남성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그들이 ‘여성’을 선택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는 해석이다. 이를 기점으로 박근혜가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더라도 여성과 남성 간에 균형을 맞추는 정치문화가 자연스레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박근혜의 대선 출마 선언 직후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이 낸 “가부장적 한국 사회에 잠재적으로 중요한 순간이 될 수 있다”는 논평의 의미와도 통한다.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남성’”이란 평가를 찬사로 받아들였던 ‘명예 남성’ 대처는 정계 활동 기간 동안 여성과 관련된 행사 참석을 꺼리는 것은 물론 서슴없이 “나는 여성해방운동에 빚진 게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보다 한참 후에 등장한 메르켈은 “여성문제를 등한시하는 것이 절대 아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