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도 ‘빌리 엘리엇’이 많이 나와야죠”
‘호두까기 인형’ ‘왕자 호동’ 등 히트작 기획
한국 발레의 르네상스 주도해

 

“발레를 하면서 늘 나 자신과 대화해 왔어요. 그러면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슬프게 하는 것도 바로 나라는 사실을 몸으로 자연스럽게 체득했죠. 은퇴했지만, 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며 늘 후배들과 함께 마음으로 춤춥니다.”

올해는 국립발레단이 창립 5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발레사의 기념비적인 해다. 50주년 기념 슬로건 ‘50년의 꿈, 100년의 감동’의 의미를 설명하는 최태지(53·사진) 국립발레단 단장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충만했다.

재일 동포 약점 딛고 국립발레단 최연소 단장으로 발탁

그가 단장과 예술감독을 겸한 1996년부터 한국 발레는 선배들이 마련한 기틀 위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르네상스를 맞았다. 그 중심에 선 최 단장에겐 ‘최초’란 수식어가 빈번히 붙곤 했다. 국립발레단의 최연소 단장 및 예술감독, 최초의 공립 예술기관 CEO(정동극장장), 세계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의 한국인 첫 심사위원, 그리고 발레 대중화의 선두주자. 한국도 아닌 일본에서 나고 자라 1980년까지 일본 무대에서 활동하다 1983년 국립발레단 객원 무용수로 ‘세헤라자데’를 통해 국내 무대에 데뷔, 4년 후 발레단의 정식 단원이 된 이력을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선입견과 장애를 극복하고 얻은 성과인지 추측할 수 있다.

“세 명의 멘토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거예요. 일본 발레계를 잘 아셨던 초대 단장 임성남 선생님께서 나를 한국으로 데려오는 결단을 내렸고, 2대 김혜식 단장님은 ‘지도위원’이란 직책을 줘서 리더십을 길러주셨죠. 그리고 김영수 문화체육부 장관님은 재일 동포에, 30대 젊은 여성이란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나를 단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교토에서도 한참 들어간 해안 지역에서 성장한 그가 발레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1960, 70년대 발레 대중화의 붐 속에 그의 집 근처에 도쿄에 본점을 둔 유명 발레학원이 있어 한 달에 한 번 도쿄에서 선생님이 내려와 발레를 가르치곤 했다. 최승희의 무대를 보고 감동했던 아버지 덕분에 9세에 발레를 시작할 수 있었다. 파리 유학 당시 너무나 힘들어하던 딸을 붙들어 일으켜 세운 것도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지만 예술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아버지의 한마디였다.

“일본에서의 한계를 깨달은 것은 프랑스 유학을 위해 문화청에 국비장학생 서류를 제출했지만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그 신청이 캔슬되는 것을 보면서였어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것도 장차 프랑스로 가서 메소드(method) 발레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는데… 어쨌든 이것이 한국으로 눈을 돌리게 한 터닝 포인트가 됐습니다.”

 

97년 ‘해설이 있는 발레’ 시도… 발레 대중화 물꼬

 

최태지 단장이 가장 인상 깊은 무대로 꼽은 ‘왕자 호동’에서 낙랑공주로 분한 모습. 상대 호동 역은 문병남 현 부예술감독.what is the generic for bystolic   bystolic coupon 2013cialis coupon free   cialis trial coupon
최태지 단장이 가장 인상 깊은 무대로 꼽은 ‘왕자 호동’에서 낙랑공주로 분한 모습. 상대 호동 역은 문병남 현 부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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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출산 후 현역으로 복귀한 첫 발레리나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첫딸(러시아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로 잘 알려진 최리나씨) 출산 후 80㎏ 가까이까지 늘어난 몸을 추스르고 나서였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실감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3㎏ 이상 안 빠졌어요. 발레를 떠나는 것에 대해 심각히 고민했지만 미국에 가서 석 달간 공부하면서 스스로 트레이닝을 했어요. 그 결과 급격히 살이 빠져 40㎏ 전후의 몸매를 되찾았죠. 이 과정 중에 깨달은 것은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움직임을 통해 스스로를 잊을 정도로 몰입하면서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과의 시간을 갖는 거예요. 아기를 낳고도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발레리나로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열망보다는 나 자신과 대화하면서 즐겁게 다시 춤을 춘 것 때문이 아닐까 해요. 아마 엔도르핀이 나와 살을 빼줬을 거예요(웃음).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너 살쪘으니 지금 당장 5㎏ 빼’라는 말보다는 ‘너를 위한 무대를 만들어줄 테니 너 자신을 닦도록 하라’는 무언의 암시가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마음에 깊이 각인된 무대는 20대 후반 첫딸이 두 살 때 그를 다시 불러낸 ‘왕자 호동’(1988)이다. 고 임성남 단장의 안무로 초연된 이 작품에서 그는 비련의 낙랑공주 역을 맡았다. 당시 호동왕자 역은 문병남 현 부예술감독.

“한국인으로서의 정서를 가지고 몰입한 무대였어요. 호동에게서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하라는 편지를 받곤 자명고를 찢을 결심을 하는 낙랑을 연기하면서 무대 위에서 눈물도 많이 흘렸죠. 그 이전에도 간간이 무대 위에서 죽는 역을 해봤지만 이처럼 드라마틱하게 죽는 역할은 처음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신혼의 사랑에 흠뻑 빠져 있어서 그 감정 변화가 같이 따라왔어요. ‘돈키호테’도 잊을 수 없는 무대죠. 1992년 한·러 수교 초기에 러시아 안무가의 손길을 거쳐 국립발레단에서 초연했는데, 둘째까지 낳은 후의 무대였지만 아무 생각 없이 발레에 빠져 있었던 것이 기억나요. 돈키호테의 상대 키트리 역을 맡았는데, 스페인 특유의 여성성에 고난도 테크닉이 현란했던 무대였죠.”

1994년 현역 발레리나로서의 생활을 접은 후에도 그는 ‘호두까기 인형’의 엄마 역 등 토슈즈를 안 신고 팬터마임으로 연기하는 역을 맡아 2000년대 초까지 무대에 서곤 했다. 그러나 그에게 맡겨진 역할은 예술가일지라도 행정가의 책무를 피할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깨닫게 했다.

“첫 번째로 단장으로 활동하던(그는 2008년 50세를 맞아 국립발레단 단장직에 직접 공모해 다시 발레단으로 돌아왔다) 2000년대 초반은 발레단의 과도기였습니다. 국립극장 산하에서 분리돼 재단법인화 과정에 있었기에 살아남기 위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시기였어요. 멋모르고 시작한 백지상태였기에 여러 경영자에게 부지런히 자문을 구했고 예산문제 때문에 기획예산처, 문화체육관광부도 발이 닳게 드나들었습니다. 그 전엔 국립극장 안에서 극장장 한 사람만 바라봤는데, 공무원들을 만나려니 줄서서 기다려야 하고, 그래도 만나기 힘들고… 어쨌든 그 과정을 통해 인내력을 다시 배웠어요.”

 

“발레리노 위해 군대에도 발레단을”

1997년 당시 그가 첫 시도한 ‘해설이 있는 발레’는 발레 대중화에 물꼬를 텄다. 새벽부터 티켓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지는가 하면 지방에서도 매진 사례가 이어졌다. 현재도 연평균 140여 차례에 이르는 발레단 공연에서 점차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가고 있는 프로그램이 해남, 울릉도 등 문화 소외지역을 찾아가는 공연이다.

“노부부가 손잡고 오는가 하면 세상 살 맛이 없었는데 이런 공연을 해줘서 고맙다는 편지도 많이 받아요. 평소엔 산만하다는 장애아들도 일단 공연이 시작되면 그렇게 무대에 집중할 수가 없어요. 변변한 탈의실 하나 없어 화장실 앞에서 화장을 하는 열악한 환경도 관객과의 내밀한 호흡과 그들의 순수한 갈채에서 느껴지는 감동으로 이겨내곤 하죠. 발레리나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을 가능한 한 많이 무대에 세워 관객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벌써 10년 전에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수석발레리나 강수진씨가 말하길 자신의 발레단은 1년 평균 200회 이상의 공연을 한다고 하더군요.”

또 한 가지, 그의 머릿속엔 발레리노에 대한 염려가 떠나지 않는다. 토슈즈를 신던 발이 2년 넘게 군화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현실. 군대에서도 발레리노로서의 경력을 계속 이어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발레단엔 40여 명의 남자 단원이 있는데, 15명 정도는 오늘내일 당장 군대에 가야 하는 처지다. 이들이 군대를 갔다 오면 복귀가 힘들고 어렵사리 복귀하더라도 센터를 맡긴 힘들다. 그래서 그는 군 생활 중에도 하루 한두 시간은 발레를 할 수 있는 시스템과 군악대가 있듯이 군 발레단도 창단해 줄 것을 국방부에 열심히 제안하고 있다.

 

7월 1일 성황리에 막을 내린 창단 50주년 기념 공연 ‘포이즈’. 참신한 시도로 호평을 받은 이날 공연은 수석무용수 김주원(앞줄 오른쪽)씨의 고별 무대이기도 했다.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http://lensbyluca.com/withdrawal/message/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cialis manufacturer coupon cialis free coupon cialis online cou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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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학교·전용극장·전속 오케스트라 갖췄으면”

향후 한국의 발레 역사 ‘100년의 감동’을 향한 그의 꿈의 핵심은 무엇보다 인재 발굴과 육성이다. 이를 위해 입시 위주의 교육에 가려진 프로페셔널한 발레를 살리기 위해 국립발레학교를 세울 것을 적극 주장하고 있다.

“지방 공연 때 무대에 흠뻑 빠진 아이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어요. 이젠 국가가 나서서 발레를 하고 싶어도 형편이 안 돼 못 하는 재능 있는 아이들에게 기회를 줘야 합니다. 우리라고 빌리 엘리엇 같은 감동 실화를 못 일구겠어요? 우린 입시에 막혀 22세가 돼서야 발레단에 입단해야 하니 무용수들의 진로가 참 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의 경우 이미 18세 때부터 프로페셔널한 발레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있어요. 강수진, 김주원 등 유명 발레리나들이 모두 외국에서 조기 교육을 받아 탄생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기에 더해, 발레가 종합예술의 꽃인 만큼 전용 극장과 전속 오케스트라도 생겨야겠죠. 그 첫 테이프를 끊고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키는 역할은 내 몫이고요.” 

그는 최근 50주년 기념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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