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변두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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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허은숙 화백
이윽고 그가 언덕길로 오르기 시작했다. 성옥은 그의 등허리에 바짝 붙었다. 그의 오른편 어깨에 머리를 얹고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숨소리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빛처럼 뜨겁고, 덤덤하면서도 가빴다. 성옥은 들킬세라 조용히 입술을 물었다. 아무래도 그의 숨소리엔 그가 감추려 하는 슬픔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만 내려야 해. 이제 내려달래야지. 더 가면 안 되지. 절대 안 돼!

성옥은 절대 안 된다고 열 번 스무 번도 더 속말을 했다. 그러나 성옥은 발버둥도 치지 않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도리어 갑작스런 열병으로 생기를  잃었거나 심하게 다친 생물체처럼 그의 등에 들러붙어서 정신없이 늘어졌다. 안 된다고 맘으로 말할 때마다 성옥은 제 몸이 늪으로 빠져드는 듯, 혼곤하고 혼곤했다.

“아저씨이.”

조금 지나서였다. 성옥이가 신음처럼 말했다. 두 번 더 그렇게 아저씨이 하고 불렀다. 그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좀 쉬었다 갈래?”

그가 말했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키를 낮췄다. 성옥이 뭉그러지듯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 순간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과 슬픔이 끼쳤다. 춥고 어두웠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은 수렁 속 같았다.

“춥구나. 술이 깨나보다.”

그에겐 성옥이가 오들오들 떠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마구 떨었다. 성옥은 한껏 웅크리고 앉아서 그의 다리 하나를 두 팔로 엉기듯 잡고 있었다. 그는 아득한 눈길로 성옥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작고 초라한 여자가 애처롭게 거기 있었다. 그가 흡, 숨을 몰아쉬었다. 손을 뻗어 성옥의 머리 위에 얹었다. 잠깐 침묵이 두 사람 주위를 감싸고 이내 스러졌다.

“집이 어디야?”

그가 언덕 위를 쳐다보며 물었다. 남루한 주택가 골목이었다. 가파른 산을 아무렇게나 깎아내고 천막집을 짓기 시작했을 빈민촌. 가난한 농촌의 소작인들이나 피란민들이 하나둘씩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곳일 터였다. 단 하나의 판자를 두른 변소 앞에는 늘 줄이 길게 늘어섰고 상수도는 산동네 중턱에 한 개쯤 있어서 그것도 줄을 서야 받을 수 있었을 사람들. 처음에 와서 판잣집을 짓고 살다가 성공한 사람들은 집을 더 사서 늘려 어엿한 양옥을 짓거나 이사를 갔을 것이다. 서울은 그렇게 몸집을 불린 도시였다.

그가 언덕을 올려다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성옥은 소리 없이 울었다. 별만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뒤부터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고향엔 자주 전깃불이 나가서 늘 어둡지만 별은 하늘 가득했다. 그 은은한 별빛으로 밤길을 걸어 다녔다.

여긴 어딘가, 왜 내가 여기 와서 이렇게 사는가. 내 집은 어디인가. 성옥은 결국 훌쩍거렸다. 성옥이의 훌쩍이는 울음소리를 들은 그가 성옥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울어요?”

그가 짐짓 장난치듯 물었다. 성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원에 갈 일은 아니지?”

그가 처음보다는 좀 심각하게 다시 물었다.

“아저씨이. 여긴 왜 별이 없어요?”

성옥이가 훌쩍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순간 그의 마음이 아저씨라는 난데없는 호칭에 걸려 멈칫했다.

“아아, 별이 없어서!”

그러나 이내 유쾌하고 통쾌하게 웃었다.

“웃지 마세요. 난, 별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훌쩍거리며 성옥이가 말했다.

“어떡하지? 별…을.”

그는 심각하지 않았다.

“북조선의 별과 한국의 별이 따로 있나요?”

성옥이가 코 메인 소리로 물었다. 손등으로 얼굴을 적신 눈물을 문질렀다. 그 위를 다시 그가 손등으로 문질러주었다. “북조선에서 볼 수 있는 별과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별이 따로 있나요? 하늘은 둥글고 하늘은 하나잖아요.” 성옥이가 징징 울면서 말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좋을까, 이 여자, 성옥. 그는 답이 없는 문제를 앞에 둔 수험생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문제를 피하고 싶진 않았다. 성옥은 너무 작고 너무 가녀리고 무엇보다 혼자였다. 별이 필요해서 울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옥이 앞에 등을 돌려대며 업히라고 말했다.

“어서 업히라니까. 추워서 덜덜 떠네. 병나면 안 되지.”

그가 말했다. 성옥은 업히지 않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등이 허전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성옥이가 저 혼자 한 발짝씩 내딛고 있었다. 저만치 위쪽에 가로등이 있었다. 그는 일어서지 않았다. 무언가 비장한 느낌이 그의 얼굴에 감돌았다. 그런 얼굴로 그가 성옥을 바라보았다. 성옥의 느린 발걸음은 여전하고 길은 가팔랐다. 길가의 쓰레기통 주변으로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 뒤엉키듯 붙었다 떨어지며 돌아다녔다.

성옥이가 멀어진다고 느껴질 때쯤이었다. 그는 후다닥 뛰어서 성옥을 따라잡았다. 순식간에 잡았던 성옥의 어깨를 놓고 손을 잡았다. 성옥의 손은 차고 그의 손은 뜨거웠다. 성옥은 놀라지 않았다.

“날 따라오면 실망할 거예요. 당연해요.”

성옥이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절망도 뜨거울 때가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성옥이가 지구에 살고 있는 70억 명의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되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가진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밖엔 그의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너무 급한 과제물 작성을 앞둬서 알바도 휴가를 냈다는 성옥이가 왜 자신을 만나려 했는지, 그 이유를 상상할 수 없어서 그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췄다. 성옥이가 조선족 남자의 전화를 받고 왜 그에게로 도망쳐야 했는지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고 이해하기란 더더욱 불가능했다.

두 사람은 곧 계단 위에 섰다. 옹벽을 친 축대 아래로 시멘트를 바른 좁은 마당 귀퉁이의 지하 계단은 어둡고 음산했다. 계단을 내려딛기 전에 성옥이가 그를 쳐다보았다. 어두컴컴해서 표정은 가려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야옹, 고양이가 울었다. 여기저기서 고양이의 다른 울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고양이네.” 성옥이가 살았구나, 이런 느낌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돌아가요.”

그를 돌아보며 성옥이가 말했다. 문을 열고 전등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켠 뒤에도 성옥은 그를 외면한 채 돌아가라고, 맘에 없는 말을 애원하듯 되풀이했다.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가지도 않고 성옥이가 방을 나서기 전까지 등을 대고 위화의 소설책을 읽었던 그 자리에 누웠다. 성옥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왜 여기까지 왔는지, 그저 안갯속에 들어온 기분이었지만 그 안개가 걷힐까 두려웠다.

“성옥!” 몇 분이나 침묵이 흘렀을까. 그가 성옥의 이름을 담임선생님처럼 불렀다. 성옥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을 바로 보지는 못했다. 그가 성옥에게 자기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손으로 방바닥을 툭툭 쳤다. 성옥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감쌌다. 나는 좋은 여자가 아니다, 깨끗한 여자도 아니다, 그렇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에서 퉁퉁 울렸다.

“방이 정겹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리고 방바닥에 겉장이 드러나게 놓인 소설책을 바라보고 그 곁에 내던져진 비닐 자루의 옥수수 튀김을 보았다.

“제발, 제발요. 돌아가요, 그래야 한다는 거 몰라요? 어른이시잖아요.”

성옥이가 말했다.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얼굴도 붉었다. 술기운은 벌써 가셨는데 다른 취기가 성옥의 몸을 온통 달궈놓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성옥을 바라보며 손으로 방바닥을 탁탁 쳤다.

“걱정하지 마. 난 나쁜 한국 남자가 아니야. 좋은 남자가 아닌 것도 맞지만 나쁜 남자도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의자에 앉았어도 몸이 허공에 뜬 듯 보이는 성옥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가 벌떡 일어나 성옥을 달랑 들어 올릴 때까지 방 안은 숨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그가 성옥을 자리에 누일 때도 그랬다. 옷의 단추를 벗기고 여민 것들을 풀고 조인 것들을 헐겁게 하는 그의 손길은 두텁고 부드럽고 편안했다. 어느 부분은 차고 어느 부분은 뜨겁고 어느 부분은 미지근하고 어느 부분은 부드럽고 어느 부분은 단단하고 딱딱하고 깊고 보드랍고 축축하고 매끄러웠다.

성옥은 행복감을 느꼈다. 포근함과 아늑함도 함께 느꼈다.

중국에서의 경험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성옥의 몸은 마치 그런 경험들을 모두 토해냈거나 뱉거나 지운 것 같았다. 험악한 표정으로 방구석에 붙은 성옥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때린 조선족 동포. 어차피 이럴 걸 왜 지랄했느냐고, 방광을 시원하게 비운 표정의 그 남자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몸도 기억해 내지 않았다.

행복감을 느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포근하고 아늑했던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는 성옥이와 다른 걸 느낀 게 딱 하나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 하나를 생각하고 더듬어 보았다. 그게 무엇인지….

그리고 어렴풋이 알아냈다. 성옥의 몸에는 절망감과 슬픔이 깊게 배었다는 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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