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시절, 나는 핑크색이나 리본에 대한 병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핑크색이나 리본뿐 아니라 현모양처, 다소곳한 분위기, 정조나 조신함 같은 단어들, 심지어 신사임당조차 싫어했다.

눈에 띄게 여성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기술·가정으로 분류된 남학생·여학생의 강제적 커리큘럼도 싫었고,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이자 며느리로 꽃다운 시절을 다 바친 엄마에 대한 연민도 있었을 것이다. 여성성에 대한 자기혐오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서른 즈음이 되어서야 ‘여자라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것 같다. 쇼핑이나 살림 같은 지극히 여성적인 활동 속에 숨은 따스한 배려의 에너지도 알게 되었고, 육아의 경험은 없지만 아기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 또한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어떤 심각한 스트레스도 친구들과의 ‘수다삼매경’만으로 치유할 수 있는 나 자신의 못말리는 여성성을 발견하면서 나는 비로소 여성성에 대한 혐오로부터 조금씩 해방되기 시작했다.

칼 구스타브 융의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 개념을 접하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진정한 여성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남성 안에 내재된 무의식적인 여성성이 아니마라면, 여성 안에 내재된 무의식적인 남성성이 아니무스라는 것이다. 독점하고 지배하고 소유하고 승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무스’의 본질이라면, 배려하고 치유하고 공유하며 용서하는 것이 ‘아니마’의 본질이다. 인간은 본래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를 구비한 ‘양성성’의 존재였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남성의 여성성, 여성의 남성성은 억압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 현대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무스보다는 아니마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여성들이 남성들 못지않게 사회에 진출하면서, 여성의 고유한 여성성 또한 위협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점하고 지배하려는 마초적 남성들뿐 아니라 성공을 꿈꾸는 여성들도 그러한 남성성의 쾌감에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이 두 가지 본성 모두가 필요하다. 하지만 점점 ‘스파르타식’으로 인간을 개조해가는 이 지독한 무한 경쟁 시대에,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배려하고 치유하고 공유하는 것, 그것이 곧 더 커다란 승리임을 깨닫는 아니마의 지혜가 아닐까.

몇 년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르누아르 특별전을 보면서 나는 내 안에 잠재된 아니마의 꽃봉오리가 나도 모르게 만개하는 감동을 느꼈다. 사실 난 르누아르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 또한 내가 ‘과도한 여성성’이라 혐오했던 그 사랑스럽고 앙증맞은 여성들을 그려내는 낭만적 취향의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누아르의 애틋한 메시지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르누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꿈에서도 가질 수 없는 능력, 즉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네.” 이것이야말로 아니마의 본질이며, 르누아르 예술의 중핵이 아닐까. 우리의 거칠고 메마른 삶을 촉촉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본능적 천재성이야말로 아니마의 핵심이며, 여성들조차 잃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집단적 아니마가 아닐까. 바느질하고, 피아노 치고, 정원을 가꾸고, 수다를 떠는 평범한 여성들 속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르누아르. 그는 우리 삶에 진정 필요한 치유와 배려의 에너지, 아니마의 본질을 가슴 깊이 이해한 예술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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