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인도 동부지방의 한 여성운동가는 이렇게 주장했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하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그저 딱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건 술 마시는 것이다.” 아직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인 동시대 동향의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는 이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지닌 심오한 지성의 수준에 끝끝내 도달할 수 없다”고 대꾸한 그는 “많은 여성이 음악을 배우지만 모차르트와 같은 훌륭한 음악가는 되지 못하지 않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20세기 미국의 어떤 사령관은 미군이 여성을 전투병으로 받아들이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은 남성들의 일이다. 전쟁터에서 생물학적인 만남은 여성이 무엇을 할 것이냐는 점에서 만족스럽지 못할 뿐 아니라 남성들에게 큰 심리적 혼란을 주게 될 것이다. 남자들은 자기와 함께 전방의 참호에 있는 여성이 아닌 후방의 여성들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같은 참호에 있는 여성은 남성의 자아를 짓밟는다. 그것을 안다면 ‘전쟁의 남성성’을 보호해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여성은 아이를 생산하고 가사를 돌보는, 집안의 ‘부처’와 ‘천사’의 임무를 떠맡았다. 전쟁과 공적 영역은 남성들의 몫이었다. 여성들이 이 견고한 경계를 뛰어넘어 ‘밖’으로 나가려면 남성과 구별되는 여성적인 특질을 거부하고 남성들이 소유한 남성성과 능력을 과시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제인 에어’를 쓴 샬롯 브론테처럼 남자의 이름으로 글을 쓰거나 우리 영화 ‘가슴 달린 여자’처럼 남장을 하고 출근하는 방법을 택했다.

“남녀평등을 외친다면 여성들도 남자처럼 전장에 나가 싸워야 해!” 그래서 여성들은 전쟁터에 나갔다. 남성의 보호를 받으며 의존하거나 ‘완벽한 여성’이라는 책에서 그려진 것처럼 남편을 숭배하면서 일생을 바치는 여성이기보다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참호로 뛰어드는 아마존이 됐다. 그리하여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는 정계에 입문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나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는 남성보다 더 남성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런 선구적 여성들의 발자국을 딛고 오늘날 세계 여성들은 술 마시는 것까지 남성에게 뒤지지 않게 변화했다. 타고르의 관점을 깨고 모차르트의 경지까진 아니더라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여성 음악가들이 많이 나왔고, 심오한 지성의 수준에 근접한 여성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에게 가진 것을 하나씩 내주는 입장인 남성들의 반응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꼴페미’ ‘된장녀’라고 부르며 여성에게 증오감을 드러내는 남성들도 생겨났다.

여성이 갈 길은 멀다. 그래서 사회에 뛰어든 여성들은 남성성을 내면화하고 남성과 대등한 능력을 내세우며 남성성이 충만한 노선을 걸었고, 지금도 그 방향을 잇는다. 그 과정에서 여성성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팔레스타인처럼 돌아가고 싶어도 존재하지 않는 부재의 이름이 되어간다. 여성운동의 지향은 남성의 위상을 끌어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위상을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공존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여성해방은 여성에게 있는 남성성의 해방을 포함하나 여성성의 부정을 의미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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