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살에 걸음마가 늦으면 지는 걸까? 4살에 영어 유치원 못 가면 지는 걸까? 8살에 반장이 못 되면 지는 걸까? … 26살에 대기업 못 가면 지는 걸까? 34살에 외제차 못 타면 지는 걸까?” 여기에 40대에 어울리는 카피가 추가된다면 ‘45살에 45평 아파트를 장만하지 못하면 지는 걸까?’일 것이다.

공중파를 탄 이 광고의 요지는 다른 사람들 기준대로 살지 말고 자기 기준으로 살자는 건데, 실제로는 은근히(또는 노골적으로) 경쟁심을 부추긴다. 사실 저 광고에 담겨 있는 문제의 본질은 걸음마, 영어유치원, 반장, 대기업, 외제차라는 평가기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는 걸까?’라는 경쟁 패러다임에 있다. 삶을 ‘이기고 지는’ 문제로 보도록 몰아간다. 그런데 이런 광고 못지않게 우리들의 경쟁심과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이웃’들이다.

민들레에서 몇 해 전에 ‘옆집 아줌마를 조심하세요’라는 주제로 좌담을 연 적이 있었다. ‘민들레’ 잡지도 보고 교육 강좌에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다잡아도 옆집만 놀러 갔다 오면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린다는 어느 엄마의 고백에서 기획된 좌담이었다. 그 엄마 말처럼 ‘반상회’야말로 우리 교육을 망치는 주범일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우리 아파트 중심의 주거문화도 한몫할 것이다. 아파트 문화는 이중성을 띤다. 벽을 마주하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만큼 독립성과 익명성을 보장하지만, 끼리끼리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당신이 사는 집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같은 광고 카피가 거기에 기름을 끼얹는다. 집 평수에 따라 자존감의 평수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비슷한 평형대의 아파트에서도 서로 끊임없이 눈치 보고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살아간다.

어느 아파트 공사장에 시공업체가 걸어 놓은 듯한 현수막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아파트는 집이 아니라 사고파는 상품이라는 사실을 방증해준다. 아파트는 사고팔기가 수월한 점에서 부동산이 아니라 거의 동산(動産)에 가깝다. 아파트라는 이 상품에는 브랜드도 붙어 있다. 브랜드와 평수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아파트라는 주거 환경이 경쟁심을 부추기면서 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옆집 아줌마를 만나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옆집 아줌마를 조심해야지 하는 나도 또 누군가의 옆집 아줌마가 아닌가? 두리번두리번 남들은 어떻게 사나 눈치 보면서 가다가 넘어지고 자빠지는 것이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고개를 가로젓게 되지만, 하늘 보고 자기를 바라보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살 수 있다고. 긍정적인 삶은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다는 말일 것이다.

‘세상의 1%’ 운운하는 텔레비전 광고를 비롯해 온 세상이 나서서 두려움을 부추긴다 해도, 경쟁심과 두려움의 근원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올바른 자기 성찰은 자연스럽게 변화를 낳는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나 하나로 끝나지 않고 주위로 퍼져간다. 그럴 때 옆집 아줌마는 함께 새로운 교육의 길을 열어가는 동지가 될 수도 있다. 공동육아, 품앗이 방과 후, 대안학교들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경계해야 할 옆집 아줌마를 동지로 만들기. 함께한다면 혼자서 극복하기 어려운 내 안의 두려움도 좀 더 쉽게 이겨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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