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경쟁이 실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교육단체인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선행학습 금지법 제정에 나섰다. 학교 교육과정보다 지나치게 앞서서 사교육을 받아봤자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만 높아질 뿐 학습 효과는 없고 공교육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이 단체의 지적이다.

선행학습 열풍은 2000년 특목고와 대학들이 경시대회 성적을 입시에 반영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지금은 자립형사립고에 가려면 적어도 1년 이상 선행학습을 마쳐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대입 논술이 어른도 독해를 못할 만큼 어려워지면서 수리논술 대비를 위해 2년 선행학습을 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학원가에선 선행학습이 ‘효자상품’이다. 보충 사교육은 개개인에 맞춰 가르치므로 채산성이 맞지 않지만, 선행학습은 어차피 진도 경쟁이므로 모든 학생에게 일괄 적용할 수 있어 비용 절감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일선 학교 교사들은 “진도 경쟁이 실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상위권 학생들은 심화학습, 중하위권 학생들은 보충학습이 필요한데 진도만 빨리 나간다고 실력이 높아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교과 진도를 충분히 따라가는 최상위권 일부 학생에게나 효과가 있을 뿐 대부분의 학생들에겐 효과가 없다는 지적이다.

선행학습은 주로 영어와 수학에 집중된다. 영어 유치원을 마친 후 초등학교 때 영어 전문학원을 다니고, 중학교 고학년이 되면 수능대비 학원으로 옮겨간다. 사립초등학교에서 1학년을 대상으로 수준별 학급 편성을 할 때 상위 클래스는 영어 유치원 출신이다.

김승현 숭실고 영어교사(휴직·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실장)는 “영어를 일상적으로 접하는 환경이 아닌데 모국어도 제대로 모르는 어린이들이 영어 조기교육을 받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며 “초등 4학년 때 두세 달이면 배울 것을 1학년 때 7∼8개월 배울 필요가 있나. 돈도, 시간도 더 많이 걸리고 공부 스트레스만 높아진다. 정작 중요한 인성이나 모국어 발달은 놓치게 된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영어 선행학습과 고교 성적 간의 연관성은 전혀 없다. 학습 태도가 좋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영어도 잘한다”며 “소아정신과 의사들은 영어 유치원 10곳이 생기면 소아정신과 1곳도 생긴다는 농담을 한다. 사교육 과열 지역에선 소아우울증 상담 사례가 많다. 영어 유치원과 초등 1·2학년의 영어교육은 규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어보다 수학 선행학습은 더 효과가 없다는 것이 교사들의 지적이다. 하위권 학생들도 수학 선행학습을 하지만, 성적 향상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수학은 기초를 쌓고 개념학습을 해야 하는 과목이다. 개념과 원리를 익히고, 심화문제를 풀 줄 알아야 한다. 몇 개월치를 예습 차원에서 훑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진도를 지나치게 앞서나갈 경우 오개념이 형성돼 수업 집중도가 떨어진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선행학습 효과에 관한 연구(2002)’를 보면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받아 수학 실력을 유지해온 상위권 학생들의 성적이 고교 2학년 시기에 하락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양분 선임연구위원은 “학원에서 미리 학습하기 때문에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내용도 이미 아는 것으로 잘못 인식해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자기주도 학습 전문가인 조남호 스터디코드 대표는 “서울대 학생 3000명과 4년 동안 인터뷰한 결과 선행학습으로 공부를 잘한 것이 아니라 개념화시켜 생각할 줄 아는 능력 때문에 상위권 대학에 입학한 것을 확인했다”며 “수능은 배운 내용을 암기해서 풀기에는 한계가 있는 시험이다. 깊이 생각해야 풀리는 문제다. 선행학습으론 깊이 있게 사고하는 능력이 길러질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