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옷은 여성의 자존심, 그리고 일할 수 있는 용기”
60년 패션인생 기념 전시회…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패션사 일별

 

“아니, 정작 난 저 사진을 못 봤네. (영화배우) 문희도 사진 촬영을 했네. 저런 때도 있었구나….”

블랙과 화이트 조명이 대비되는 전시장 한가운데서 쉼 없이 바뀌는 화면(스쳐지나가는 영상 중엔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얽혀 있다)에 매료된 채 무심코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사실상 한국의 패션 성장기다. 전시장 전체를 휘감는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일제 암흑기를 거쳐 해방 후, 6·25, 근대 산업화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처연한 현실이 엄연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또 한편에선 꿈같은 일이 벌어졌음을 실감한다. 그러나 그것도 그에 따르면 엄연히 현실이다. 왜? “패션은 근본적으로 다 똑같지만 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뿐이다. 사회현상과 함께 가는 것이니까.”

“노라 노가 없다면, 미니스커트도 판탈롱도 없다”

디자이너 노라 노(84·사진)만큼 ‘한국 최초’란 수식어가 많이 붙는 여성이 또 있을까.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로 1956년 국내 최초로 패션쇼를 열고, 1966년 백화점 납품을 통해 본격적인 기성복 시대를 열고, 1970년대 한국산 실크로 해외시장을 개척하면서 세계 패션의 중심지 뉴욕 7번가에 동양 디자이너 최초로 자신의 브랜드를 내걸고 승승장구, 미국판 ‘보그’지에 자신의 옷을 입힌 모델을 전면에 등장시킨 일 등. 여기에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직업 ‘모델’이란 일자리를 창출한 공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어령 선생의 말대로, 그가 없었다면 한국에 미니스커트도, 판탈롱도 없었으리라.

이 모든 역사가 한 사람의 몸에 이렇게 저렇게 다 담겨있다는 사실보다도 팔순을 절반 가까이 넘긴 현재도 현역으로서의 그의 역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서울 명동에 ‘노라 노의 집’을 개원한 지 딱 60주년이 되는 기념비적 ‘사건’을 기념해 6월 2일까지 열리는 ‘La Vie En Rose’(장밋빛 인생) 전시회장에서 만난 이 패션계의 대모에게선 모델 같은 꼿꼿한 몸매와 포즈, 무표정함을 통해 범상치 않은 강렬함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블랙 의상 특유의 냉정함을 한 꺼풀 벗기니 의외로 친화력이 강했다. 그도 고백한다. 디자이너의 첫 자질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옷 만드는 작업은 자신에게 엄격함과 세심함을 훈련시켰다고 말한다.

“옷을 만들어 판다는 것, 여기엔 인간적으로 깊은 유대가 필요해요. 난 사람을 참 좋아하는데, 그렇기에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사람을 만나 좋은 관계를 맺어오며 옷을 만들어 온 것이 너무나 행복하죠. 고객 중엔 어머니, 딸, 또 그의 딸과 자매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단골도 있어요. 개업 첫날 세 명의 한국은행 간부 부인들이 첫 손님이 됐는데, 이들도 이후 평생 단골이 됐죠. 그래서 이들 단골들에게 60주년을 기념해 원하는 옷을 디자인해 선물해주기로 했어요. 연극배우 백성희, 영화배우 최은희·엄앵란·김지미 등 전성기에 의상을 담당했던 스타들과도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어요.”

당대를 풍미했던 배우들의 의상 외에도 1960년대 가수 윤복희의 초미니 원피스, 펄시스터즈의 판탈롱은 이목을 집중시키며 그의 이름을 대중에 알렸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자신의 혁신적인 시도들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1947년 혈혈단신으로 도미해 공부하며 패션산업에서 일했기에 패션이 어떻게 돌아갈지,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

“왜 스타들의 옷에 손을 많이 댔느냐고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사업을 시작했을 당시엔 우리 GNP가 백 불도 채 안 되던 때였어요. 패션이란 말도 생소했고 일반 대중은 디자이너의 옷을 맞춰 입기 힘들었으니 내가 원해서라기보다 자연스럽게 영화와 무대의상 작업을 하게 된 거죠. 여기에 패션쇼를 하다 보니 초기엔 영화배우 중심으로 모델을 썼으나 전문적인 직업모델의 필요성도 절감하게 됐고, 대중이 좀 더 쉽게 옷을 접할 수 있도록 기성복 시장 개척에도 눈을 돌리게 된 거죠. 역시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어요.”

60년대 초반 하와이에서의 2년여 체류 기간 동안 그가 중점적으로 구상했던 것은 한국에도 기성복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었다. 1966년, 그는 귀국 직후 그동안 수많은 맞춤복을 만들면서 모아놓은 우리나라 여성들의 평균 체격 자료를 바탕으로 체형별 기성복을 내놓는 시도를 하게 된다. 당시 한국일보 장명수 기자(현 이화학당 이사장)의 도움을 받아 “마음대로 입어보고 골라 입는 옷”으로 콘셉트를 정했다. 그러나 사회의 시선은 냉소적이었다. ‘기성복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란 제목의 기사도 종종 등장했을 정도. 그러나 현재의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던 미우만백화점 2층의 그의 기성복 코너가 오픈하던 날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그날로 그가 준비한 옷들이 동이 났다. 그는 내친 김에 TV 의상 협찬이란 아이디어를 냈고, 그해 드라마 ‘내 멋에 산다’의 여주인공 전향이의 의상을 시작으로 강부자, 여운계, 사미자, 윤여정, 윤소정 등의 의상을 협찬했다. 이것이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으면서 기성복 시장 확장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기성복 시장 개척하고 ‘모델’ 직업 창출

 

195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국내 첫 패션쇼를 열어 반향을 일으키고 얼마 후 같은 호텔 옥상에서 국내 첫 야외 패션쇼를 열어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195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국내 첫 패션쇼를 열어 반향을 일으키고 얼마 후 같은 호텔 옥상에서 국내 첫 야외 패션쇼를 열어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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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창경원(현 창경궁) 수정궁에서 열린 한미면직협회 공동 주최의 패션쇼에 등장한 미국의 목화아가씨를 계기로 최초의 직업 모델을 뽑는 시도도 했는데, 당시 대회 1등을 한 변자영씨는 후에 1세대 모델로 크게 이름을 날린다. 그에 따르면 변씨는 “지금까지 보아온 한국형 미인들과는 크게 달라 ‘퍼니 페이스’(funny face)라 불러도 좋을 독특한 생김새에 늘씬한 몸매를 갖춘 새로운 감각의 미인”이었고, 이후 패션계엔 이 같은 기조가 전통처럼 흘러내려왔다.

그의 상상력이 놀랍게 발휘된 부분은 특히 무대의상에서였다. 십대에 접한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은 아직도 그의 머리에 선명히 각인돼 있다. 보살춤의 현란한 춤사위와 함께 구슬목걸이를 늘어뜨려 가슴만 살짝 가리고 손톱 발톱은 길게 붙여 선명한 빨간색 매니큐어를 칠한 모습은 매혹적인 파격이었다. 여기에 경기여고 시절부터 잠재돼온 문학 소녀의 감성이 발동했으리라. 일례로, 전쟁 직후의 어수선한 틈에서도 국립극장 전속극단이었던 신협이 무대에 올리는 셰익스피어 명작들의 의상 제작에 전념한 것이 그렇다. 배우 김동원씨가 맡은 햄릿 왕자의 화려한 벨벳 재킷을 위해 어머니의 벨벳 치마를, 오델로 장군의 위용을 위해 미군 담요로 속을 만들어 넣고 안감용 타프타로 커다란 망토를 제작했다. 배우들은 두고두고 그의 창의성에 감사했다.

어떻게 보면 그의 패션 유전자는 대를 이어 내려온 결과물이다. 황태자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외할아버지는 유럽식 사파리 스타일을 포함해 일흔 벌이 넘는 고급 양복을 애용했고, 저고리를 색깔별로 겹쳐 입고 거기에 맞춘 브로치를 달고 다니면서 버선 맵시가 좋아 지인들이 버선본을 떠가곤 했다는 외할머니에, 한국 최초의 아나운서로 기록되는 어머니 이옥경 여사가 그렇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멋내기 DNA’가 이 길을 운명적으로 가게 했다고도 할 수 있죠. 특히 우리 어머니만 한 멋쟁이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신여성이었던 어머니는 수송초등학교 근처 광장에 있는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숍에서 양장을 맞춰 입으시곤 했어요.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수놓는 기계 등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기한 의상 제작 기구를 곁눈질로 보면서 감탄하곤 했어요.” 

그는 세상에서 제일 멋쟁이 여성들이 로마 여성들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옷을 너무나 좋아하고, 집 벽은 쓰러져도 새 옷을 입고 나올 정도로” 멋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기 때문. 그런데 그 못지않은 멋쟁이가 바로 한국 여성들이란다. 당대 최고로 양장이 잘 어울렸던 그의 어머니 역시 이 제1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

아버지가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인으로 경성방송국의 개국을 주도하는 등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한 그이지만 격동의 시대와 맞물려 겪은 시련은 남달랐다. 당대 최고의 멋쟁이였던 어머니는 임신 7개월의 몸으로 전차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잘라내고 평생 의족에 의지해 살아야 했고, 아버지의 별세로 스물일곱 나이에 그는 가장으로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길을 걷게 된다. 이에 앞서 일제 침략기에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결혼했지만 신혼 일주일도 채 안 돼 남편은 전장으로 끌려가고 이후 남편이 살아 돌아온 후에도 “인간답게 살 수 없는 한 집안의 며느리로 남아 한 번뿐인 내 인생을 끝마치고 싶지 않다”며 19세에 이혼을 감행했다. 그는 광복 후 식산은행장의 비서로 일하던 당시 어머니의 감각을 물려받은 그의 옷차림에 주목한 한 미국인의 권유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이때 한국명 ‘노명자’ 대신 스스로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주인공인 ‘노라’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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