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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성의 전화 회장에 이상덕(42) 한국여성의 전화 부회장이 선출

됐다. 창립 기금 마련에 너무 바쁜 그와 인터뷰 약속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주일을 미루고 잡은 약속이었는데도 정작 약

속한 날 또 시간과 장소를 바꾸어야 했다. 오후 4시 장충동 여성평

화의 집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은 오후 5시 인사동으로 변경됐다.

“후, 너무 미안해요. 제가 이렇게 살아요. 요즘 창립 기금을 마련하

느라 여기저기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저녁에는 여기

백상기념관에서 참여연대 모임이 있어요. 여기서 저희 창립기금마련

콘서트 표를 무더기로 팔아야지요.”

일을 ‘만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투. 꽉찬 스케줄 때

문에 어렵게 맞춘 약속 시간을 바꾼 것에 너무 미안해하면서도 그는

숨 돌릴 틈도없이 서울여성의 전화의 향후 계획을 먼저 꺼냈다.

그가 밝힌 향후 계획은 대략 네가지이다. 첫번째는 피해받는 여성

을 위한 서비스 강화. 성폭력 상담과 매맞는 여성을 위한 쉼터 운영

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다음으로 피해자 중심의 운동을 적극

적인 개념으로 바꾸어 나가겠다는 것. 그는 ‘여성의 경제세력화’

를 예로 들면서 여성의 취업확대를 위한 고용구조 개선 운동을 벌여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청소년 사업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업

활성화와 차세대 여성운동가 발굴도 중요한 계획이다.

“뜻이 좋으면 돈은 모일 겁니다”

스스로 1세대 여성운동가의 마지막 사람이라고 자처한 그는 차세대

여성운동가의 발굴에 한층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저는 소위 1세대 여성운동가라고 할 수 있는 이효재 선생님, 박영

숙 선생님들로부터 배운 마지막 제자에 속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1세대와 2세대를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

니 저는 차세대 운동가를 발굴하고 육성시키는 일에 당연히 열심이

어야 하지 않겠어요. 후배 여성운동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데 디딤

돌이 되고 싶습니다.”

1세대와 차세대를 잇는 디딤돌이고 싶다는 그는 70년대 크리스챤아

카데미가 벌인 여성사회교육 프로그램의 맨마지막 이수자이기도 하

다.

지금보다 더 많은 운동을 벌이려면 그만큼 예산이 많이 들텐데, 재

정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재정문제를 어렵

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뜻이 좋으

면 돈은 결국 모일 겁니다. 모금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신뢰라는 생

각이 들어요. 열심히 일하면 통하게 돼 있어요. 다리 품을 팔고 신뢰

를 팔아서 재정을 메꿔나갈 겁니다.”

“여성운동을 평생직업으로 삼고 싶어요”

그가 여성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크리스챤아카데미의 여성

사회교육과정을 밟으면서이지만 ‘작정’하고 여성운동가의 길을 걷

기 시작한 때는 80년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이다. 직접적인 계기는

80년 광주 사태. 당시 이대 가정대에서 석서과정을 밟고 있던 그는

무대의상을 전공해 대학교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대

학교수가 되면 연극반 지도교수를 해야겠다는 생각까지도 했다. 학

창시절 연극에 빠져 있었을 때 모든 꿈을 연극과 연관지어 하는 버

릇 때문이었다. 하지만 광주사태를 보면서 더 이상 공부를 계속 하

고 싶지 않았다. 일종의 죄의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매달 발간하는 <새가정>기자일을 시작으

로 여성운동을 직업으로 삼게됐다.

<새가정> 기자 시절 한국여성유권자연맹 청년부 활동과 여성평우

회 문화부장을 병행하기도 했다. 여성유권자연맹에서 일을 할 때는

간사로 신혜수 한국여성의 전화 회장이, 스태프로는 이경숙 한국여

성민우회 회장, 김경애 동덕여대 여성학 교수가 활동하고 있었다.

5년간의 기자 생활을 끝내고 한국여성의 전화 교육부장으로 지내다

가 13대 국회에서 박영숙 평민당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그가

여성의 전화에서 일하던 무렵 박영숙 의원은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장

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그 시절의 경험들이 현재 운동의 기틀이 되

었다고 하면서도 또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라고 털어놓는다. 현장

과 떨어진 고립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너

무 많이 괴롭혔다는 것이다.

보좌관 시절에는 서울시 의원에 출마한 적도 있다. 정당 공천을 받

은 여성이 개인 사정으로 출마를 할 수 없게 되자 “이렇게 되면 여

성을 공천해도 아무소용이 없다”는 말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에 그

가 대신 출마를 결심한 것이다. 결과는 낙선. 하지만 그는 “어떻게

따낸 자린데 그냥 물릴 수는 없잖아요. 출마 그자체로 큰 의미가 있

는 거였어요”라고 말했다. 보좌관 생활을 마치고 한국환경사회정책

연구소에서 박영숙 전 의원과 함께 일하다 95년 2월 한국여성의 전

화 부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이곳에서 지금까지 생활해 왔다.

그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이효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

표와 박영숙 의원을 꼽는다. 그리고 자신도 평생 여성운동가이고 싶

다는 말에 무게를 싣는다. “순수함을 잃지 않고 늘 현장을 지키는

이분들처럼 살고 싶어요. 여성운동도 하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직업을 평생할 겁니다.” 무거운 짐을 오히려 반기는 그의

힘찬모습이 여성운동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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