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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있다. 집에만 있는 주부들은 이기성과 무분별함, 뒤쳐진 사회성 등으로 일찌기 지리멸렬한 무기력한 존재라는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아줌마’의 잠재력과 힘을 벌써부터 알아차린 이가 있다. 바로 한국여성민우회의 이경숙 공동대표(46). 이경숙 대표는 여성운동에 주부들과 같은 일반 여성들의 참여를 이끌고, 대중화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올해초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라는 중책도 함께 맡았다.

6남 2녀 중 막내딸로 차별은 커녕 귀여움을 받고 자란 그는 대학때까지 그야말로‘범생 중에 범생’이었다. 대학에 취업 추천의뢰가 들어오면 제일 먼저 그의 차지가 될 정도였고, 당연히‘운동’과도 거리가 멀었다.

“대학때 운동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 의로운 일을 하고는 있지만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생각에, 항상 우선순위는 학생본분이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수업을 거의 빠지면서 운동을 한다는 것이 저에겐 불성실한 모습으로 비쳤어요. 나중에야 제가 여성운동을 하면서 학업에 집중할 수 없는 운동권학생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요.”

‘직장’, 인생의 첫번째 전환점

그의 인생항로를 바꾼 건 대학졸업 후 직장생활이었다. 그는 아마도 직장생활을 안 했다면 지금의 여성운동가 이경숙은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첫 직장은 '학원'이라는 잡지사였고, 다시 취직을 한 것이 바로 OB그룹 기획실에서 사보를 만드는 일이었다.

“회사에 들어갈 때 결혼각서제라는 것이 있었는데,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둔다는 각서를 쓰고 들어갔어요. 그 당시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죠. 첫 출근에도 여직원들은 책상 닦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여성문제라고 생각하기보다 인간으로서 자존심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죠. 당시 노조는 생산직에만 있었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대항하기란 힘들었어요. 여직원들은 고졸여성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런 문제제기에 대해 별 호응을 보이지 않았구요. 하는 수없이 기획실에 있는 대졸여직원 5명만이라도 문제제기를 하기로 했고, 상사에게 남자직원들과 달리 사적인 심부름, 청소 같은 업무외의 것을 시키지 말 것을 요구했어요. 그래서 결국 책상 닦는 일은 사무실 청소원에게 1만원 정도 더 지불해 맡기도록 지시가 내려졌고, 남자직원들의 차심부름도 없어졌죠.

그런데 첫월급을 받은 후 또 문제가 생겼어요. 당연히 남자, 여자 똑같을 줄로만 알고 있다가 남녀 월급차이가 있다는 걸 알고 부당하게 느껴졌죠. 다른 회사와 비교했을 때도 남녀 직원의 월급 차이가 컸어요. 그래서 개선을 요구했어요. 당시만 해도 소수의 여성이 반발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는데도, 그런 개선들이 차츰 가능했던 건, 강경하게 나가는 대신 반대쪽에서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구체적 대안을 가지고 교섭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일들을 경험하며 그는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동료여직원들과 함께 한국여성유권자연맹 청년부에 들어갔고,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하는 교육도 들었다. 결국 그는 2년 넘는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맘먹었다.

“사실 모범생으로만 살아왔기 때문에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말 혼란스러움을 많이 겪었죠. 게다가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이라는 걸 읽게 됐는데, 우리사회에서 명사로 대접받던 사람들의 친일행각들이 밝혀져 있었어요. 그때까지 배우고, 알고 있던 것과 너무 다르다는 사실에 충격이었죠. 그리곤 내가 너무 뭘 모르는 것 같아 사학을 배우고 싶어서 대학원을 들어갔어요. 역사관을 좀더 분명히 갖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었고, 그게 나중에 운동하면서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그때 처음으로 제가 다니던 이화여대에 여성학이 도입됐고, 여성학 커리큘럼 짜는 일과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 참여했죠.”

그후 그는 대학내 여성연구소에서 일을 했고, 여성평우회가 만들어질 때 실무자로 함께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여성운동가의 길을 걷게 됐다.

87년 평우회 해체 후엔 여성민우회를 만드는 데 동참했다. 평우회가 진보적 지식인 중심 조직이었다면, 민우회는 일반 여성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대중조직 건설이 목표였다. 그는 일반여성들과 호흡하기 위해선 주부들과 밀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92년부터 노원도봉지회 대표를 맡으며 지역활동을 시작했다.

“그때 주부들과 함께 하면서 제가 또 한번 변했죠. 운동을 하면서 한번도 제 생일을 챙겨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거기선 사람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생일을 챙겨주는 거예요. 생일을 챙긴다든가 누가 아플 때 방문을 한다든가 하는 것 등이 운동가들에겐 사소하고 사사로운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반여성들에겐 중요하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운동이라는 게 이념도 중요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끈끈한 정도 중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

그후부터 그는 주부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주부들의 생활패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주부들이 많이 가는 곳이 여성문화센터였다. 그래서 그도 직접 가보고, 여성단체 프로그램에 응용도 했다.

‘주부운동’, 두 번째 전환점

“그전까지는 그런 곳에 가는 주부들은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보니까 상당히 건강한 주부들이었고, 돈도 그렇게 많이 들지 않았어요. 나름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투자하는 모습도 의미있는 것인데 내가 그전까지 너무 쉽게 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젠 문화센터에 가는 여성들도 여성단체에 올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문턱을 낮추는 작업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문화센터에서 하는 비슷한 강좌들도 개설했죠. 예를 들어 메이컵 강좌도 했는데, 우리는 좀 다르게 친환경적인 화장품을 사용하도록 유도한다거나, 화장이라는 것이 그저 외모만을 꾸미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접근했죠. 사실, 여성단체 사람들은 화장도 안 하고, 외모에 전혀 신경도 안 쓰잖아요. 예전에 민우회 대표하던 이금라 씨가 민우회 사람들은 ‘못나기 경연대회’하는 것 같다고 했을 정도였어요. 일반여성들은 어떻게 하면 남한테 자기를 잘 보일까 고민하는데, 여성운동하는 사람들은 전혀 그런데 신경을 쓰지 않잖아요. 너무 일반여성들과의 간극이 심한 거죠. 화장을 예절의 하나로 생각하는 일반여성들을 이해하고, 저도 화장을 하기 시작했고, 옷입는 것에도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어요.”

여성운동의 이념이야 양보할 수 없지만, 일반여성들과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함께 동화할 수 있는 건 해야 된다는 게 그의 생각. 일반여성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선, 여성운동가들이 먼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200명에서 출발한 민우회가 이제 1만5천 명의 회원을 갖게 됐으니 어느 정도 여성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한 데 성공한 셈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커 국채보상운동하듯이 금반지를 모으기도 했고, 상근자들에게 월 5만원의 임금이 나와 오히려 돈을 내고 다녀야 할 형편이었다고. 민우회에서 생활협동조합을 만들 때도 출자금을 내며 어렵게 시작했지만, 현재 회원이 3천5백여 명으로 불어나 생협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진 덕분에 이제는 어느 정도 재정적 토대가 마련된 상태라고 한다.

“생협이 여자가 중심이 돼서 만들어진 건 민우회가 처음이에요. 생협운동이 원래 일본에서 왔는데, 그곳도 회원들은 여자가 많지만, 핵심지도부는 다들 남성들이 맡고 있어요. 그래서 일본인들이 와서 보고는 어떻게 여성들이 해냈냐고 놀랄 정도예요. 사실 우리는 몇몇 여성들이 한 것도 아니고 회원들이 모두 열심히 했기 때문에 가능했거든요. 그래서 민우회 생협 회원들을 개미군단이라고 해요.”

민우회는 무엇보다 대중사업을 중시하는 만큼 여러가지 일들을 하고 있다. 직장내 성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꾸준한 작업들을 비롯, 주부들과 관련해서는 먹거리운동인 생협운동, 환경운동, 그리고 최근에는 많은 법 개정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식변화를 위해 미디어의 중요성을 인식해 미디어운동을 펴나가고 있다.

현재 무역업을 하고 있는 남편은 친구 소개로 만나 결혼을 했다.

“우리는 일하다가 늦게 들어온다거나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돼요. 서로가 하는 일에 대해 방해가 안 되도록 하는 게 철칙이에요. 남편은 대학때부터 운동을 했던 사람이라 현재 무역업을 하면서도 일선에 나서지는 않지만 뒤에서 재야단체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있지요.”

슬하에는 대학교 1학년에 다니는 아들과 고등학교 1학년생인 딸이 있다.

“큰 애를 출산했을 때도 두 달 만에 활동을 했고, 둘째 때는 여성평우회를 만들 당시라 20일 만에 나왔어요. 계속 일을 하는 엄마를 봐왔기 때문에 애들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죠. 하지만 특별히 신경쓴 건 아이들의 정서적인 부분이었어요. 엄마가 없어도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은 했지요. 엄마가 한번도 강조하지 않았는데도 큰 애는 환경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전공도 그쪽을 택했고, 앞으로도 그 길을 가겠다고 하는 걸 보면 대견스러워요. 내가 하는 일이 비록 고달프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즐겁게 하고 있듯이, 우리 애들도 마찬가지로 무엇을 하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운동’이 좋은 사람

그렇게 바쁘게 살아도 그는 한번도 주부로 집안에만 있겠다는 유혹을 받아본 적이 없단다.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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