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 월남 이유로 27년간 수용소 갇혀”
강냉이 훔치다 붙잡혀 총살형, 손금 봤다는 이유로 교수형도
배고픔 못 이겨 탈출…중국서 노예처럼 인신매매되는 여성들

“18호 관리소에 있을 당시 배가 부른 상태에서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산에 도토리나무 잎사귀를 따러 갔다가 아기를 낳았어요. (울먹이며) 아기가 나오니 배가 쑥 들어갔어요. 배낭을 찢어 갓난아기를 쌌어요. 산길을 벌벌 기면서 50m쯤 가니 한 할머니의 도움으로 남편이 왔어요. 산나물국에 강냉이 가루를 하루 한두 끼밖에 못 먹으니 젖이 나오질 않아서….”

탈북 여성 김혜숙(50)씨가 북한 정치범수용소에서 출산하던 일을 증언하자 포럼장에는 짙은 한숨과 탄식이 쏟아졌다. 9일 저녁 서울 중구 태평로1가 뉴서울호텔 2층. ‘평화하나 여성둘’의 아홉 번째 포럼에 참석한 김씨는 수용소에서 겪은 27년의 삶과 목숨을 건 북한 탈출기를 풀어놓았다.

강제노동, 폭력, 공개처형

 

북한 정치범수용소 최장기수 탈북자인 김혜숙씨가 수용소에 만연한 폭력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sumatriptan patch http://sumatriptannow.com/patch sumatriptan patch
북한 정치범수용소 최장기수 탈북자인 김혜숙씨가 수용소에 만연한 폭력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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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효식 / 여성신문 사진기자 yesphoto@womennews.co.kr
그는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최장기수 탈북자다. 열세 살 때 평남 북창군 석산리 제18호 정치범수용소로 강제이주해 탄광에서 일하다 마흔 넘어 중년이 돼서야 ‘감옥’에서 벗어났다. 그는 현재 북한정치범수용소철폐운동본부 본부장을 맡아 국제사회에 북한 인권 실태를 고발하고 있다.

김씨는 “수감생활에서 ‘해제’된 뒤에야 왜 끌려갔는지 알게 됐다. 조부가 6·25전쟁 때 월남했다는 것이 강제이주 된 이유였다”며 “여동생 둘과 남동생은 18호 관리소에 41년째 있는데도 아직 이유를 모른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날 포럼은 한국여성정치연구소(소장 김은주)가 주최하고, 한스자이델 한국사무소가 후원했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증언에 이어 독일연방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청산재단에서 제작하고 독일국영방송이 방송한 옛 동독 여성정치범수용소 영상물 ‘1년 같은 하루’를 시청한 후 독재가 여성의 삶에 끼친 영향에 대해 토론했다.

김씨는 이주민 학교를 졸업한 후 심산 갱에서 석탄을 탄차에 실어 나르는 채탄공으로 배치를 받았다. 열일곱 살 때다. 하루 작업량을 못 채우면 16시간씩 강제노동을 하는 일은 예사였다. 독재는 그의 삶을 파괴했다. 남편과 남동생을 탄광에서 잃었다. 수용소에서 ‘해제’된 뒤인 2003년 대홍수로 집이 떠내려가 어린 딸과 아들까지 잃었다. 결국 2005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했다.

김씨는 18호 정치범수용소 일대 지도를 비롯해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들을 보여주며 강제노동과 폭력, 공개처형 실태를 증언했다. “관리소에선 보위부원이 손가락으로 ‘앉으라’는 지시를 하면 뒷짐 지고 앉아야 해요. 그럼 ‘아가리 벌려’ 하곤 가래침을 뱉어요. 나도 모르게 ‘억’ 하면 무릎이 꿇린 상태에서 온갖 매를 다 맞아야 해요. (중략) 수용소에선 1년에 20∼30명은 공판장에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강냉이 30이삭을 훔쳐 나오다 붙잡혀 총살당한 이주민도 있고, 한 아주머니는 다른 사람의 손금을 봐줬는데 미신을 믿었다며 교수형을 당했어요.”

김씨는 북한에서 돼지를 사오라는 중국인 식당 주인의 지시에 다시 북한에 들어갔다가 2007년 검문에 걸려 붙잡혔다. 18호 관리소에 재수용 됐을 당시 그는 인육 살인사건을 목격했다. 엄마가 열여섯 살 난 사내아이를 잡아 돼지고기 장사꾼에서 넘겨주고 강냉이 13㎏을 받은 것이다. 이듬해 3월 그는 다시 수용소 탈출에 성공했다.

“목단강 농촌마을로 팔려간 북한 여성은 형제가 넷인 집안의 둘째 며느리가 됐는데 하루는 맏이, 다음날은 셋째, 그 다음날은 넷째 아들이 번갈아가며 밤새도록 성적 욕구를 채우느라 잠을 재우지 않았다고 한다”고 증언했다. 그 역시 중국으로 다시 탈출했을 때 한족에게 팔려 9개월간 함께 살았다. 김씨는 2009년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한국에 입국했다. 하나원에서 만나 재혼한 남편 김명철씨 역시 함경남도 요덕 정치범수용소(15호 관리소)에 8년간 갇혔던 탈북자다.

여성의 삶을 파괴한 독재자들

 

9일 서울 중구 뉴서울호텔에서 열린 ‘평화하나 여성둘’ 9회 포럼 현장.
9일 서울 중구 뉴서울호텔에서 열린 ‘평화하나 여성둘’ 9회 포럼 현장.
그의 증언 이후 옛 동독 남부 작센주 돌베르크 지역에 있는 호엔에크 여성정치범수용소에 관한 영상물을 시청했다. 김영수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사무국장이 해설을 맡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군사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여성 1000명이 ‘1년 같은 하루’를 보낸 곳이다. 이들은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들과 함께 수감됐다.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영상물에선 이젠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노인이 된 여성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하루 500㏄가량의 멀건 보리죽이 전부였어요. 먹거리가 부실하니 머리카락이 빠지고 생리가 끊겼지요.” “반항하면 물이 가득 찬 방에 가뒀어요. 냉장고처럼 춥고 빛 한 줌 안 들어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지 못했죠.”

독재가 이산의 아픔을 낳은 것은 옛 동독이든, 북한이든 필연적으로 같았다. 1953∼56년 수감된 한 여성은 “당국이 ‘9살, 7살인 아들 형제를 사회주의정신에 맞게 키울 자격이 없다’며 고아원에 보내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생이별했다”며 울먹였다.

이날 남편인 안청시 서울대 명예교수와 함께 포럼에 참석한 손봉숙 전 국회의원은 “북한 정치범수용소에선 왜 끌려갔는지,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지 모른 채 긴 세월을 보내야만 한다”며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김혜숙씨의 끈기와 용기가 놀랍고 대단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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