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을 존중하는 교육, 배려와 공생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어야

학교폭력과 왕따가 사회문제로 대두된다. 원인과 해법에 대한 백가쟁명식의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왕따와 학교폭력은 별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아픈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 평소 청소년들의 심리와 왕따문제에 대해 연구해온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가 전하는 해법을 싣는다.<편집자 주>

 

곽금주 서울대 교수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what is the generic for bystolic   bystolic coupon 2013cialis coupon free discount prescription coupons cialis trial coupon
곽금주 서울대 교수
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
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what is the generic for bystolic bystolic coupon 2013
cialis coupon free discount prescription coupons cialis trial coupon
수차례 영화화된 바 있는 윌리엄 골딩의 장편 소설 “파리 대왕”에는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권력과 폭력에 대한 욕망이 날 것 그대로 잘 드러나 있다. 불시착으로 무인도에 고립된 여러 명의 남자 아이들은 처음에는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기도 하지만 곧 민주주의적 권력과 합리적 토론을 반박하면서 폭력과 야만으로 군림하는 무리가 생기고 두 집단은 맹렬히 반목한다. 이 책에서 가장 참담한 장면은 광기에 사로잡혀 사냥에 심취한 아이들이 한 아이를 희생양 삼아 따돌리고 괴롭히면서 집요하게 추격하는 사건이다. 희생자를 나와 같이 개성과 존엄성을 지닌 사람으로 보기 보다는 사냥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동일한 대상을 함께 ‘사냥’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 사이의 집단 내 응집력이 높아짐은 물론이다. 이처럼 인간은 집단을 형성하고 서열을 정하는 과정에서 집단 결속력을 해치는 구성원을 없애려는 집단적인 공격본능을 지닌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이는 자연스러운 인간 본성 중 하나이다. 인간 이외의 동물 사회에서도 집단이 한명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왕따 현상은 집단을 구성하는 쉽게 볼 수 있다. 개미들의 조직에서도 한 명의 여왕 개미를 두기 위해서 개미들이 다른 여왕 개미 후보들을 차례 차례 왕따 시킨다. 집단생활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개미 세계에서 이는 스스로의 도태와 죽음을 초래한다. 이렇듯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소외시키고자 하는 경향은 진화적 역사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인간, 아니 동물의 본능적인 욕구라 할 수 있다. 희생양의 존재가 있을 때 집단 구성원내의 유대감이나 친화력은 더욱 강화되고 집단 구성원들은 비로소 스스로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왕따 현상은 한국의 오래된 문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면신례'라 불리던 관리들의 신참 신고식이 대표적이다. 면신례는 기존 관리들이 새로 뽑힌 관리들을 괴롭히는 형태였다. 물론 이것은 신고식이라 할 수 있겠지만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하급자를 대상으로 하는 의도적인 공격적 행위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면신례'는 일종의 왕따 현상이었다. 벌주 먹이기, 얼굴에 오물 칠하기, 광대 짓 하게 하기, 선배 관원의 가랑이 밑으로 지나가게 하기 등 신체적 괴롭힘뿐 아니라 선배들에게 값비싼 술과 음식을 대접하게 하는 등의 경제적 수탈까지 행해졌다. 또한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특정 관리에게 선배들과 새로 뽑힌 관원들이 합심해서 모욕을 주고,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는 방법 등으로 정신적 괴롭힘을 행했다. 그 정도가 점점 심해져 급기야 단종 1년에는 승운원에 파견된 '정윤화'라는 신입관리가 '면신례'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 했으며, 숙종, 중종 때는 면신례를 법으로 금하기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따 행동은 툭툭 치는 건드림에서부터 집단구타와 같은 신체적인 폭력, 비꼬는 말에서부터 욕과 같은 언어적 폭력 그리고 집단에서 개인을 소외시키는 사회적 배척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IT 강국답게 메일이나 메신저 혹은 핸드폰 메시지 등에 의한 사이버 폭력이 더욱 기승이다. 오프라인에서의 폭력은 폭력을 차단할 수 있는 시간, 즉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할 때에는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 어디를 가던 도착하는 메시지는 24시간을 공포로 만들고 어디서도 쉴 수 없게 만든다. 치욕적인 사진을 찍어 다른 학생들에게 동시에 전송하고 비난과 조롱을 퍼붓는 형태의 사이버 괴롭힘 또한 피해자들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초래한다. 왕따 행위가 나와 다른 이질성이 두드러진 대상에 집중된다는 점에서 이질성에 대한 거부감이 두드러진 우리 사회는 특히 왕따의 위험성이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단일민족 믿음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 점차 늘어나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의 위험은 매우 높다. 실제로 2012년 1월 10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행정안전부 통계에서 2007년 5월, 4만 4258명이던 다문화 가정 자녀는 2011년 1월 현재 15만 1154명으로 4년도 안 돼 약 3.4배로 증가했는데 이는 해마다 약 2만 5000명씩 늘어나는 꼴이라고 한다. 그런데 201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다문화 가정 자녀 18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들 중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아동은 37%에 달했다. 그 이유도 단지 발음이 이상하거나 외국인 부모를 뒀거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다름에 대한 거부감과 이질감이 팽배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우려하게 하는 사건이 이미 2007년 미국의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났다. 한국계 대학생이 아무 연고도 없는 같은 대학의 학생 33명을 총기로 난사한 사건이다. 조승희, 그 스스로 만든 또 다른 이름, 이스마일 엑스(Ismaile ax). 그 이름에서 그의 실패와 고립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름의 의미가 성경의 인물 아브라함의 서자인 이스마일이든 소설 백경에 등장하는 이스마일이든, 둘은 모두 가족이나 대인관계에서 실패하고 고립되어 그 집단을 떠나 버린 인물이다. 고교 시절 동료들이 전하는 것처럼 왕따와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경험한 조씨는 자신과 이 인물들을 동일시한 것은 아닐까. 지나치게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소외당하는 당사자의 고통은 우울, 사회적 위축, 정신 병리를 유발할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치명적 폭력행동으로 연결될 수 있다. 편견과 차별이 심한 우리 사회에,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지만 제 2의 조승희가 자라고 있을 수 있다. 아이들은 학교와 교실에서 친구를 왕따시켜 죽음으로 몰아가고, 성인 사회에서는 지연, 학연, 경제수준에 의한 편 가름, 진보와 보수라는 양극화를 경험한다. 이 모두가 다름을 결코 인정하지 못하는 한국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는 것 같다. 왕따의 보편성과 역사성을 생각하면 그 해결책이 단순하지 않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어른들이 먼저 차별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의 편견과 차별도 감소할 것이다. 전반적인 교육체제가 바뀌어야 한다. 지나친 상대적 비교에 의한 학업 위주의 교육 환경, 그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아이들은 그것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자극적인 뭔가를 찾으려 할 것이고 결국 종일 교실과 학원 내에 갇혀 있어야 하는 아이들은 친구 괴롭히는 게임을 택하게 된다. 좀더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체제가 수립되어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전체적인 교육 개혁이 필요 할 것이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성숙된 인격체가 될 수 있는 기본 소양 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가정뿐 아니라 학교 모두에서도 교과과목에 이런 실제적인 교육이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사고를 발달시키는 것에 더해 좀 더 감성을 키울 수 있는 문화 교육 또한 이루어 져야 한다. 음악, 미술, 공연 등 다양한 문화적인 감성을 가꾸는 데 도움이 되는 공연장 관람이나 문화체험 기회를 확장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뭔가 강력한 정부 의지가 요구된다. 물론 이미 벌어진 폭력에 대한 처벌은 단호해야 할 것이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대안학교도 잘 운영한다면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한번 더 낙인찍어 버리는 학교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준비하기 위한 쉼표가 될 수 있도록 과감한 예산과 지원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정신적 상처에 대한 치료가 절실하다. 아울러 앞으로 우리 사회에 나타날 폭력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어린 시기의 예방이 요구된다. 일상에서 ‘사람같다’라는 말은 두 가지 경우에 쓰인다. 차마 인정하기 싫은 인간의 맨얼굴에 대해서도, 또 그것을 벗어나 더 높은 수준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윤리적인 인간의 얼굴에 대해서도 우리는 ‘사람같다’고 한다. 왕따와 폭력은 인간의 어두운 얼굴이다. 우리 사회가, 우리 아이들이 마냥 어두운 얼굴로 살아가게 해서야 되겠는가? 어두운 얼굴을 본능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진정 사람답다고 말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