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근태 고문의 영원한 동지 인재근 여사
남편 고문 참상 전 세계에 알려… 민가협 결성에 87년 민주항쟁 주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힘 잃지 않으면 끝내는 이겨낼 수 있다”

인재근의 고운 얼굴 아른거리지 않았더라면

해파리처럼 풀어지고 말았을 몸

죽음을 깔아뭉개며 아침마다 되살아나던

근태의 방이란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부인 인재근 여사가 2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미사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cialis coupon free prescriptions coupons cialis trial coupon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부인 인재근 여사가 2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미사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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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효식 / 여성신문 사진기자 yesphoto@womennews.co.kr
고 문익환 목사는 생전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 시에 ‘희망의 증거’로 ‘인재근’을 집어넣었다. 지난해 12월 30일 고문 후유증 끝에 향년 64세로 영면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수감됐던 서울구치소 병사 9호실, 이 살벌한 곳에서 그의 아내 ‘인재근’(59)은 김 고문의 생명줄이었다. 1978년 결혼, 30여 년을 함께해온 이들 부부의 삶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이자 “당신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이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란 고백처럼 평등 부부를 넘어 평생 동지의 삶이었다.

김 고문 사후 인씨는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됐다. 15대부터 내리 3선 의원을 지낸 남편을 도와 일구어온 지역구(서울 도봉갑)를 계승해 이번 4월 총선에 나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남편을 대신해 정치 일선에 뛰어든 여성이 있긴 하지만, 일회성에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남편의 그림자에 묻혀 독자적 행보를 기대할 수 없었던 그들과 인씨는 확연히 다르다는 게 중평이다.

그들 부부를 근거리에서 지켜본 이들은 하나같이 “대표적 민주 인사로 국회의원, 복지부장관을 거친 남편 김 고문을 ‘내조’했다는 표현은 인씨에겐 맞지 않는다. 인재근은 인재근일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 고문 자신도 생전 아내에 대해 “인재근은 김근태의 바깥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심지어 여성신문과의 인터뷰(666호)에서 “인재근씨는 정치를 하면 잘할 사람”이라며 벌써부터 자신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인씨를 꼽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을 정도다.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잘 뚫어보고 사람들에게 이를 간결한 문장으로 잘 전달하며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남편이 꼽은 아내의 정치적 장점이었다. 지인들은 생전 김 고문의 “나보다도 당당한 인재근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럴 때 나는 자랑스럽다.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인재근이 됐을 것”이란 말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노동 현장에서 함께 뛰었던 이들은 최영희 국회 여성가족위원장(민주통합당 최고위원)과 장명국 내일신문 사장의 주선으로 첫 만남을 가졌다. 결혼 이후 그들의 삶은 20여 년간 김 고문의 수배와 도피, 수형의 고난으로 점철됐고, 아내 인씨는 남편의 부재 동안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 남편을 세계적 양심수로 대외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5년 서울대 깃발사건의 배후 혐의로 남편이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로 끌려가 10여 차례에 걸친 전기·물 고문을 받았던 ‘짐승의 시간’에 대한 증언은 인씨의 용기와 결단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검찰청 복도에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기지를 발휘해 가수 이미자의 가요 테이프 중간에 남편의 말을 녹음했고, 이 테이프를 당시 미주 한국일보 기자에게 전달, 군사독재 정권의 잔인함을 국제적으로 폭로했다. 이 일로 1987년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의 공동 수상자로 남편과 함께 선정됐다. 한편으론 초대 총무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산파 역할을 했고, 1987년 6월 항쟁에선 민주쟁취운동본부 상임 집행위원으로 항쟁의 흐름을 주도했다. 

이들 부부를 잘 아는 이들은 “정말 닮았으면서도 다르다”라는 말을 한다. 청렴함과 원칙주의, 언행일치 면에선 닮았지만, 남편은 학자형에 가까운 데 비해 아내는 확실히 야전사령관형이라는 것이다. 인씨는 남편에게 다소 부족한 대중성과 흡인력을 가졌다는 평도 한다.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민주당 여성국장을 지낸 김수영씨는 대학 3학년 민주투쟁 집회 때 딸을 들쳐 업고 온 평범한 아줌마로 보였던 인씨가 강단에 올라 남편의 고문 사실을 고발했던 당시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여학생들을 향해 “우리 함께 하자”고 했던 그의 말은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인씨와 30여 년 선후배 사이인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연구원 김화순 박사는 인씨를 “열린 공간 같은 선배”라고 말한다. 개인사부터 시대적 고민까지 샅샅이 말할 수 있는 넉넉함과 소통의 능력이 있다는 것. 30대 때 부부 갈등으로 두 달여를 무작정 인씨 집에서 기거하며 위로받았던 그는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으니 나처럼 신세지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근태가 이 땅에 남겨두고 간 ‘비밀병기’”로 불리는 인씨는 추모제에서 “반드시 2012년을 점령해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민족통일을 앞당기는 일에 제가 앞장설 테니 함께 해달라”며 이제까지의 행보를 계속할 것임을 시사했다. 한편으론 여성신문과의 인터뷰(879호)에서 밝혔듯이 “여성, 장애인, 아동,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위한 방향으로 활동 폭을 넓히고 있다”는 것도 주목된다.

가장 기대되는 것은 언론인 출신인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의 “이 여자가 정치를 하면 세상이 즐거워진다”는 전망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싸우는 여자지만 동시에 가장 푸근하고 후덕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노래, 고무줄놀이, 장기자랑으로 아이들이 아버지와의 면회를 ‘소풍’으로 추억하게 하고, 재판정에서 늘 웃어 “원고 부인은 웃지 말라”는 호통을 수차례 들었던 인재근씨.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힘을 스스로 잃지 않으면 끝내는 이겨낼 수 있다”며 핍박할수록 돋보였던 그의 내공이 팍팍한 정치 현실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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