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의 대모’ 고 박병선 박사의 일생
‘직지의 대모’ 고 박병선 박사의 일생
  • 이은경 / 여성신문 편집위원
  • 승인 2011.12.23 12:05
  • 수정 2011-12-23 12: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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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냉대 속에 꽃핀 한 역사학자의 꿈과 신념
“밥 먹고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자라”… 고국 학자 적대감이 가장 가슴 아파
“프랑스도 ‘약탈’ 인정했는데… 조속히 ‘대여’를 ‘반환’으로 바꾸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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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병인양요(1866) 당시 프랑스 함대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 그 존재를 국내외에 알리기 시작하면서 고 박병선 박사는 줄곧 프랑스 국립도서관 측으로부터 “그 도서를 네가 ‘찾은 거지’, 어떻게 그것을 네가 ‘발견’한 것이냐”는 트집과 비난을 당해야 했다. 생전 그가 파리 현지에서의 어느 인터뷰에서 오죽하면 이런 처사를 두고 “도서관에서 나를 달달 볶았다”고 회고했을까. 도서관 측은 이에 관련된 한국의 신문 기사를 일일이 번역해 그를 몰아붙이곤 했는데, 여기에는 한국어와 불어의 어감의 차이뿐만 아니라 외규장각 도서에 관한 발표는 자국의 모리스 쿠랑이 가장 먼저 했다는 자부심도 섞여 있었다. 모리스 쿠랑의 경우, 책 제목과 소재, 크기 정도만 언급했을 뿐이지만 박 박사는 제목을 종류별로 모두 정리해 이를 기자들에게 일일이 보고해주곤 했다. 생전 그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그의 삶을 되돌아볼수록 당시 언론에서 표현한 ‘발견’이란 표현이 더없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토록 오랜 세월 영광은커녕 한·불 양국의 냉담한 무관심과 조직적 핍박 속에서 고난을 자처한 지난한 ‘발견’의 족적이 바로 그의 삶이다. 그 스스로도 “긴 시간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한국 정부와 학자들의 냉대”라고 토로한 바 있다. 연구와 관련한 참고 서적을 한국 학자들에게 구했을 때 “서지학(책에 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기술하는 학문)도 안 한 사람이 왜 서지학에 손을 대느냐” “밥 먹고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자라”는 답변이 돌아오기도 했다.

“외규장각 찾아라” 스승 당부가 40여 년간 버팀목 역할

반면 그 오랜 세월을 버티게 해준 것은 서울대 사대 사회생활학과(역사학과) 시절 스승인 고 이병도 박사(1896~1989)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고서를 약탈해 갔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인이 안 된다. 유학 가면 한번 찾아보라”는 당부였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를 붙든 한마디이다. 1955년 유학길에 오른 후 10여 년을 외규장각을 찾아 도서관과 박물관을 뒤지고 다녔지만 허사였다. 그러다 우연치 않게 발견한 것이 바로 ‘직지심체요절’(직지)이었다.

1967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임시 사서로 근무를 시작한 첫 해였다. 먼지 쌓인 이 책은 당시 막연히 중국 책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책 맨 뒷장에 적힌 ‘1377년 금속으로 찍은 활자본’이란 내용을 보고 본격적으로 직지 고증을 시작했다. 특히 직지 안에 적혀 있던 주조(鑄造)라는 글자가 주요 단서였다. 시간이 없었기에 매일 커피와 빵만으로 연명할 정도로 수면과 식사 시간을 극도로 줄였지만 늘 “머리가 딴 데 있어 장을 보러 가도 하나만 사고는 다 샀다고 생각하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자신도 하도 답답해 “너 같은 맹꽁이도 없다”고 자책하곤 했다(현지 ‘파리아줌마’와의 인터뷰). 무엇보다 한국의 활자사를 추측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의 활자사 중 어디를 먼저 참고해야 할지도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때 그 시절 활자를 직접 만드는 실험을 감행했다. 금속활자 고증을 위해 지우개, 감자, 흙을 동원하고, 세라믹 오븐을 구할 수 없어 부엌 오븐에 직접 글자를 굽다가 오븐을 세 개나 망가뜨리고 집 유리창을 깨서 주인에게 싫은 소리도 들었다. 한자와 일어에 능통한 이점에도 불구하고 고증을 위해 매일 밤을 새워야 했다. 도서관 동료들은 그의 빨개진 눈을 보고 “어젯밤 울었어?”라고 묻곤 했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1972년 파리 ‘세계 도서의 해 기념 고서 전시회’와 유럽 내 ‘동양학자대회’에서 이 직지가 구텐베르크보다 78년 앞서 제작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임을 공표·입증해 전 세계 학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후에 직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그가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직지에 “1377년에 금속으로 만든 활자본”이라고 표기하기까지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동안 직지에 대해 ‘가정’을 뜻하는 ‘Si’(If)를 붙여 표기해왔던 도서관 측은 이 ‘Si’를 빼고 단정적 표현으로 표기한 그에게 “만약 당신이 표기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도서관 영예로 돌리지만, 혹 실수라면 순전히 당신 개인의 책임”이란 조건을 못 박았다. 직지를 통해 세계 활자사를 바꿔놓은 그는 이후 ‘직지의 대모’로 불리게 된다. 그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엘리제궁에서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을 만났을 때 미테랑 대통령이 직지 영인본을 내놓으면서 “이렇게 훌륭한 문화를 가진 국가의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인사말을 듣고 어깨가 으쓱했다는 후일담을 전했다. 후에 전 전 대통령은 직지가 이 일을 계기로 직지의 고향 청주에 고인쇄박물관 건립을 지시하게 됐다고 한다. 직지 발견 이후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그의 실증 연구는 불이 붙었다. 이후 “병인양요 때 가져온 도서는 모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이라고 기술한 모리스 쿠랑의 조선서지 기록을 단서로 3000만 권이 넘는 도서관 소장 책들을 꼼꼼히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고증을 위해 도서관에서 3000만 권 넘는 책 일일이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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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외규장각 의궤와의 인연도 직지 못지않게 파란만장했다. 30여 년이 넘어서야 ‘고국 귀환’이란 끝을 볼 정도로 역사도 너무 길다. 마음 한편에 늘 외규장각을 품고 살았던 그는 1978년 우연히 베르사유궁에 파손된 책을 보관하는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다가 푸른 천을 씌운 큰 책을 만나게 된다. 바로 도서관 창고에서 파지로 분류돼 잠자고 있던 조선왕실 기록물 외규장각 의궤였다. 처음엔 외규장각 도서 목록과 제목만을 정리해 기자들에게 알리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반역자 취급을 당하다(그는 1967년 동백림 사건 여파로 프랑스에 귀화했다) 1979년 도서관 측으로부터 해고를 당하게 된다. 이후 10여 년을 ‘개인’ 자격으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도서관이 문을 닫는 오후 5시까지 꼼짝하지 않고 조사를 지속했다.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우면 책을 일찍 반환하라 할까 두려워 밥도 안 먹을 정도였다. 그때 붙은 그의 별명이 ‘파란 책 속에 묻혀 있는 여성’. 297권, 어렵사리 요약한 방대한 내용을 불어로 타이핑 하느라 아껴 간직했던 골동품들을 팔아 비용을 충당했다. 때론 그마저도 모자라 시간을 짜내 판화 수선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한편으론 주한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관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외규장각 의궤가 현재 창고에 파지로 분류돼 보관돼 있고, 카드도 대장도 없는 상태니 반환 교섭을 하는 것이 간단할 것이다. 힘 좀 써달라는 애원을 했다. 당시 대사는 호의적이었지만 한·불 관계의 미묘함을 들어 완곡히 그의 청을 거절했다.

수차례 민원 끝에 1991년 당시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이었던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을 중심으로 외규장각 도서 반환운동이 본격화됐다. 이윽고 지난해 한·불 양국 대통령이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임대 형식으로 대여에 합의함으로써 올해 4월 고국 땅을 밟게 됐다. 그는 생전에 “도대체 그 책을 왜 반환해야 하느냐”고 묻는 프랑스인들에게 “만약 루이14세의 왕실 행사를 자세히 기록한 유일한 문서본이 다른 나라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되묻곤 했다. 그러면 십중팔구 프랑스인들은 “당연히 찾아와야 한다”고 답했다고. 그는 외규장각 귀환의 기쁨 속에서도 “프랑스 법원도 외규장각을 약탈했다는 부분을 인정했는데, ‘대여’ 형식으로 되돌려 받는 것이 말이 되느냐. 온 국민이 힘을 합쳐 ‘대여’를 하루빨리 ‘반환’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일침을 잊지 않았다.

병인양요 저술 마무리를 유언으로… 파리에 독립기념관 건립 염원

외규장각 귀환 직전 파리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했던 그는 타계 직전까지 파리에 건립할 독립기념관을 염원했다. 50여 년을 파리에 거주하면서 1만5000여 쪽 분량, 2000여 개 상자 분량의 관련 자료를 모았다. 이들 대부분은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관 등에서 3·1운동 당시 한국 주재 프랑스 영사관이 고국에 보낸 공문서나, 일제 때 일본과 중국 주재 프랑스 공관의 공문서 중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한 서류 등이다. 특히 1919년 파리 강화회의 당시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했던 김규식 선생 일행이 파리 9구 샤토덩 38번지에 임시정부를 차려 외교활동을 전개했던 사실을 발견, 집주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사관과 협력해 한·불 수교 120주년이던 2006년, 이곳에 기념 현판을 거는 작은 쾌거를 일구기도 했다. 또 말년에 병원 치료비가 모자라 허덕이면서도 후학 양성을 위해 써달라며 유산 2억원과 9개 상자에 이르는 장서를 인천 가톨릭대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의 유언은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2편’의 저술을 마무리지어 달라는 당부. 끝까지 역사학자로서의 소명의식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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