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 가족’ 밖으로 나와야 세상이 변하죠”
가족아카데미아 통해 공동체 봉사활동… 2남2녀와함께 살며 대가족 실험

 

이근후·이동원 부부는 장성한 2남2녀와 손주들과 함께 북한산 밑 구기동에 집을 짓고 새로운 대가족을 실험하고 있다. 이 공동 생활에서 가족들은 가족헌장을 만들고, 가족 반장 선출 등 ‘규정’을 준수하고 있다.sumatriptan patch sumatriptan patch sumatriptan patchcialis coupon free prescriptions coupons cialis trial coupon
이근후·이동원 부부는 장성한 2남2녀와 손주들과 함께 북한산 밑 구기동에 집을 짓고 새로운 대가족을 실험하고 있다. 이 공동 생활에서 가족들은 가족헌장을 만들고, 가족 반장 선출 등 ‘규정’을 준수하고 있다.
sumatriptan patch sumatriptan patch sumatriptan patch
cialis coupon free prescriptions coupons cialis trial coupon
ⓒ한향주 객원기자
결혼을 기점으로 평생 서로 격려하며 손잡고 한길을 달려온 부부가 있다. ‘가족’에 대한 고민과 실험에서 비롯된 이들의 팀워크는 점점 가지를 치며 공동체를 향해 뻗어나갔다. 정년퇴임 후 이들 부부의 실험은 오히려 한층 탄력을 받으며 활발해지고 있다. 1995년 ㈔가족아카데미아를 공동 창립하고 운영 중인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근후(76)·사회학자 이동원(74) 이화여대 명예교수 부부 얘기다. 이들 부부는 가족아카데미아를 주축으로 부모·예비 노인·공부방 교사 교육 등 다양한 사회교육과 함께 광명보육원, 네팔 등을 지원하는 나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12일 큰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운치가 더해진 서울 종로구 세검정 가족아카데미아 사무실에서 이들 부부를 만나 학문과 현장을 한길로 이어온 삶의 여정과 더불어 저출산·고령화 사회에 대한 고민과 대안을 들어보았다.

결혼 50년, 정신과 전문의와 사회심리학자로 동행

18일 결혼 50주년을 앞두고 있는 이들 부부에 대해 지인들이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일찍이 집 대문에 ‘이동원·이근후’라는, 아내의 이름을 먼저 쓴 부부 공동 문패다.  이들이 ‘동지’로 굳게 묶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신혼 초 불어닥친 경제적 어려움 덕(?)이었다. 이근후 박사의 여동생과 중학교 동창인 인연으로 결혼까지 하게 된 이동원 박사는 막연히 결혼 전부터 남편이 병원을 차리면 자신의 전공을 살려 같이 일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대학원에서 심리학 공부까지 했다고 한다.

부부는 자의 반 타의 반 한길을 걸었다.  연세대에 재직했던 이근후 박사가 아내가 근무하는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아내는 남편의 이직을 내심 불편해했지만, 그 덕에 70년대 말 윤후정·정의숙 교수 등과 함께 여성학 도입 과정을 2년간 함께 준비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이들 부부가 구체적으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다. 경북 대구 출신인 이근후 박사는 적십자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신여성 어머니 덕분에, 이동원 박사는 안동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절대적으로 우대했던 “타고난 여성학자”였던 친할머니 덕분에 여성학의 씨앗을 이미 내재하고 있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부부의 관심 축은 자연스레 ‘가족’으로 옮겨갔다.

“고령화 사회, 20대부터 예비 노인 교육으로 준비를”

“여러 임상 케이스를 보면서 새로운 가족관계는 ‘인터디펜던트’(interdependent 상호 의존적)해야 건강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의 가족관계는 너무 의존적(dependent)이고, 서구의 가족관계는 또 너무 독립적(independent)인데, 그 중간이 필요한 것이다. 즉 가족 구성원 각자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면서도 어느 정도 공유를 하는 그런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이근후 박사)   

이들 부부는 장성한 2남2녀와 손주들과 함께 북한산 밑 구기동에 집을 짓고 새로운 대가족을 실험하고 있다. 처음엔 부모의 노후 돌봄과 육아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극히 현실적인 생각에서 자식들이 먼저 제안한 공동생활은 부부가 토지를 제공하고 자녀들 각자가 대출 등을 통해 재원을 마련해 성사됐다. 어언 10여 년 지속되고 있는 대가족 관계에서 이근후 박사가 처음부터 강조해마지 않은 것은 상호 불간섭주의와 독립성 보장. 그래서 각 가구의 평수와 내부 구조, 출입문 모두 제각각 형편에 맞게 다 다르게 만들었다. “너무 가까이 끌어안으면 고슴도치처럼 부지불식간에 서로 찌르게 될까봐”서다. 이 공동생활에선 부모라도 자식의 허락을 구하고서야 자식들의 집을 방문하고, 조를 짜서 순환제로 식사 당번을 맡고, 6개월 단위로 가족 반장을 선출해 공동 통장을 관리하는 등의 ‘규정’이 준수된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앉아 토론 끝에 가족헌장도 만들었다.

이런 개인적 체험 때문인지 이들 부부는 유난히 ‘예비 노인’ 교육을 강조한다. 20대도 따지고 보면 다 예비 노인, 젊어서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핵심은 자기 정체성을 찾고 그에 따른 역할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날 때 칭찬을 많이 들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하며 자신감을 가지듯 노인들도 주눅 들지 않고 능력을 갖춘 전문인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부의 모든 활동의 단초는 개인적 사회적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다. 개인·가족·사회의 건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정체성이고, 구체적으론 “내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전제다. 근래 시도 중인 공부방 교사를 대상으로 한 교육이나 경찰 대상 심리교육에서도 이는 어김없이 입증됐다. 피폐한 근무 환경에서 어떻게 다양한 심리치료 프로그램으로 자기 돌봄을 실현할 수 있는지가 포인트다. 한국인들은 개인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트라우마도 커 보통 상태에선 원활히 돌아갈 것도 스트레스가 고조된 상태에선 갈등을 야기한다. 사회병폐 현상이 된다는 것. 이근후 박사는 “한국 사회는 분노의 사회”라 규정한다. 예전 같으면 산에 올라가 소리 한 번 빽 지르면 분노가 풀렸는데, 지금의 소셜미디어 네트워크 시대엔 한 사람의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즉시 전이돼 거대한 불씨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고속 경쟁사회가 트라우마 부채질 “차라리 스티브 잡스가 없었더라면”

“이런 사회병리 현상은 전 세계 공통인 글로벌 문제다.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선택하는 순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역설적으로 스티브 잡스 같은 IT 혁명의 리더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 오히려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새로운 모델에 사람들이 적응할 수 있는 ‘유예 기간’을 허용하지 않고 바로바로 신모델을 개발하니까. 풍요 속 빈곤이라고나 할까, 성취감을 맛볼 새도 없이 다른 곳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면 경쟁에 뒤처진다.”(이근후 박사)

이들 부부는 의대 시절 대학생 최초로 경북학생산악연맹 창립에 참여하는 등 산과 밀접한 인연을 맺어온 이근후 박사가 1982년 학술원정 대원으로 히말라야 마칼루 원정에 참여, 반년간 네팔 구석구석을 누빈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네팔 사람들과 다양한 인연을 맺어 지원해오고 있다. 첫 네팔 방문에서 이근후 박사는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경을 현지에서 만나 학교와 병원을 짓고 자연보호운동을 펼치는 그의 봉사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후 최소1년에 한 번은 네팔을 방문하면서 의료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정년퇴임 후엔 지원이 적어도, 의사가 없어도 약 먹는 요령만 가르쳐주면 치료할 수 있는 간질 환자에 집중하고 있다. 한편으론 한국에 유학 온 네팔 학생들을 집에 데려와 숙식을 제공해주며 지원하는 한편, 그들이 의사가 돼 고국에 돌아가면 자연스레 그의 의료봉사 활동에 동참케 했다. 이근후 박사는 네팔인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에 온 것이 돈벌이 목적이 돼선 안 된다. 한국에서 얻은 것을 고국에 돌아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한다. 그 덕분인지 그의 강연을 듣고 네팔로 돌아간 사람들 중 학교를 세우고 교장이 된 사람이 다섯 명이나 된다. 그는 2000년대 초 음식 값 문제로 주인과 옥신각신하다가 경찰서에 연행된 후 한국말이 서툴러 6년간 정신병원에 감금됐던 네팔 여성 찬드라 구롱씨를 구출해내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가 네팔에 갈 때면 어김없이 찬드라가 찾아와 감사 인사를 한다고 한다.

“찬드라는 네팔에서 여성 문맹 퇴치를 위한 교육운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들어 ‘나같이 글을 모르면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강연한다는데, 호응이 크다고 한다. 그렇게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 그토록 몸부림을 쳤는데, 진작 누구 한 사람이라도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토록 오랫동안 억류되지 않았을 텐데. 찬드라에 대한 한국인의 사과는 그를 지원했던 ‘풀꽃세상을위한모임’과 나 정도다. 한국인의 무례함에 대해 제때에 사과했어야 했는데….”(이근후 박사)

네팔·광명보육원 나눔 봉사활동… “선한 동기 작은 조직이 사회변혁의 힘”

이들 부부는 ‘작은 변화’에서 행복함을 만끽하곤 한다. 대표적인 것이 이근후 박사가 60년대 말 군의관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광명보육원 아이들이다. 이 보육원에 “환자를 진료할 때 따지지 마라”는 의미의 이 박사의 호 ‘무하’(無何)를 딴 ‘무하문화사랑방’을 열고 아이들에게 자존감 회복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시인과 화가 등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 아이들에게 예술 체험 교육을 시킨다. 아이들이 각종 백일장에 나가 상을 휩쓸 정도로 성과가 좋다고 한다. 아이들의 멘토 중엔 그와 10여 년 지기인 고 박완서 작가도 있는데, “여기 와서 아이들을 보면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절로 하곤 한다”며 “매년 백일장 때마다 아이들 시상을 위해 몸소 오신다”고 했다.

“예전엔 전쟁 등으로 부모 없는 사람만 고아였고 그래서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절실했는데, 요즘은 부모가 있어도 버려지는 아이

m

sumatriptan patch http://sumatriptannow.com/patch sumatriptan patch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