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와 육아에 대한 부담이 가장 큰 장애 요인
맞춤형 어린이집·여성 연출가 네트워크 등 자구책 마련
그러나 그들은 “돈은 둘째 문제”라며 경제적 악조건에서도 자신들의 열정과 노력을 희망으로 치환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0년차 연출가 백순원(39)씨는 공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투잡’을 하고 있다. 일부러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생계와 작품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레 연애나 결혼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게 됐다. “결혼이란 적어도 지금의 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한다. 그는 “예술인이라는 직업적 특성상 4대 보험의 혜택조차 받지 못했었는데, 극단의 대표라는 직책을 갖게 되자 면세사업자로 돼 있어도 국민연금은 득달같이 내라고 하더라”며 씁쓸해했다.
결혼 이후 육아 및 가사에 대한 부담은 여성 연극인 활동의 가장 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어린 연령대로 고용이 집중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류정아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은 “여성 친화적인 측면이 있어서인지 연극에 있어서도 20대 사회 초년생의 경우 여성의 비율이 남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지만 이런 현상은 40대 이후 급반전된다”며 “이는 연령별로 비교적 고른 고용 분포를 보이는 남성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문화체육관광부의 발표(‘2010년 성별 문화인력 통계 DB 연구’ 2011.4)에 따르면 연극계 연령별 고용 현황은 20대에서 여성이 46%, 남성이 21%였던 것이 50대로 가면 여성이 10%, 남성이 27%로 역전된다. 또 여성 연극인만 놓고 봤을 때도 연령별 고용 분포는 90% 이상이 20~30대에 집중돼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연극인들은 스스로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서기도 한다. 원로배우 박정자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이 대표적이다. 연극배우들의 출연료 1%와 극단·기획사의 매표 수입 1%에다 각계의 후원금을 보태 꾸려 가는데, 특히 국내 최초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사례를 찾기 힘든 예술인 맞춤 보육 지원 사업인 ‘대학로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2010년 개원한 이 어린이집의 운영 시간은 평일은 오후 11시까지, 공휴일은 오후 7시까지다. 쉬는 날은 없다.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15년간 배우로 활동해온 김서희(36)씨는 5살 난 딸아이를 기르는 워킹맘이다. 아이를 낳고는 1년에 한두 작품에만 출연했지만, 대학로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면서 점차 편수를 늘려 최근에는 서너달에 한 편씩 꾸준히 무대에 서고 있다. 그는 “내 몸이 힘든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의 손을 타며 적응을 못 하고 힘들어 하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며 “직업의 특성상 늦은 밤이나 공휴일에도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를 마음 놓고 맡길 곳이 없었는데 이런 곳이 생겨 정말 좋다”고 전했다.
‘배고프다’는 말이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연극계지만 막상 연극인들의 급여에 대해 꾸준한 조사를 하는 곳은 거의 없다. 다만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이 2008년 전국에 있는 연극배우 154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열악한 현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조사된 연극배우의 평균 임금은 월 36만원 수준이었다. 1년에 평균 221일을 일하고 받는 돈이 모두 합쳐 434만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현행 노동법상 연극인은 근로자로 구분되지 않아 사회보험망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국민연금 23.9%, 고용보험 15.3%, 산재보험 17.4%의 가입률에 불과하고, 의료보험은 76.8%로 비교적 높은 가입률을 보이지만 이마저도 대부분이 직장보험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지역보험이다.
여성 연출가들끼리 네트워크를 형성해 일종의 창작 집단을 구성하고 ‘품앗이’를 하며 서로를 독려하는 움직임도 있다. 수익금을 내기는 힘들지만 제작비는 많이 드는 연극 창작 작업의 특성상 제작자가 여럿이 되면 그 비용도 자연스레 줄어들기 때문. 연극계의 소수자인 젊은 여성 연출가들이 모여 여성의 시선으로 해석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자 기획돼 올해로 7회를 맞은 ‘여성연출가전’이 대표적인 예다. 연극 제작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대관료를 나눠 지불하고 무대장치나 소품도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자구책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승옥 한국여성연극인협의회 회장은 “한국 연극의 역사가 올해로 102년째지만 연극계가 가난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것만 보장해달라는 것”이라며 “여성 연극인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신의 재능을 묻어두지 말고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