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 8일 수요일, 당시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가 방한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용기 있게 생존자임을 고발하고,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국과 일본, 국제 여론에 서서히 오르내리기 시작할 때였다. 일본에서, 미국에서 위안부 관련 군 문서가 발견돼 일본군의 개입을 부인하던 일본 정부의 입장에 대해 반대와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때였다. 그날, 여성들이 일본 대사관 앞에 모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위를 수요일마다 계속하기로 결의한 후 행동으로 옮긴 첫 날이었다.

2회, 3회, 4회…. 수요일마다 시위는 계속됐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하겠다고 선언하고 시작한 시위가 100회가 되면 해결되겠지 했는데, 그것도 그대로 넘기고, 200회, 600회, 800회도 그냥 넘기더니 어느새 1000번째 수요시위를 맞게 됐다. 2011년 12월 14일, 수요일 낮 12시.

처음에는 부끄러운 존재라며 얼굴을 대중 앞에 내놓지 못하셨던 피해자들이 달라졌다. “우리는 부끄러운 존재가 아니다. 일본 정부가 부끄러워해야 하고, 한국 정부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하며 일본 정부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고 ‘역사의 진실’ ‘역사에 대한 책임’이라고 한다. 1000번의 행진 때마다 가장 앞줄에 앉아 서울 한복판 하늘 위에 아무 거리낌 없이 당당히 펄럭이는 일장기를 향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나라가 되라며 호통이라도 치듯 팔을 힘차게 내뻗으며 외쳐왔다.

“사죄하라!” “배상하라!” “역사교과서에 올바르게 기록하라!” “책임자를 처벌하라!” 너무나 당당한 모습이다. 청소년들이, 청년들이 할머니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참석했다가 오히려 힘을 얻어 간다며 피해자들 앞에 머리를 숙인다. “커서 훌륭한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할머니들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할게요.” “외교관이 되어서….” “변호사가 되어서….” “인권운동가가 되어서….” 아이들이 저마다 할머니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다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기적을 만들며 계속돼온 수요시위, 1000번째 수요시위 때는 세계 100여개국, 1000개의 지역에서 함께 연대행동이 펼쳐질 것이다. 교실에서, 전시장에서, 극장에서, 거리에서, 일본대사관 앞에서, 공공건물 앞에서 일본 정부에 피해자들에게 인권을 회복시키라는 요구들이 터져나올 것이다.

또 서울, 일본대사관이 있는 평화로에는 조용한 소녀상이 평화비라는 이름으로 세워질 것이다. 열세 살, 열네 살 어린 소녀 시절에 일본군에 끌려가 성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던 모진 세월, 그 시간들을 견디면서 품었던 희망, 해방이라 할 수 없는 해방을 맞은 후, 다시 전쟁 같은 삶을 살면서 지나온 50년의 역사, 그리고 문제 해결을 외쳐온 20년의 역사, 그 역사를 평화비에 담아 평화로를 지나는 사람들과 평화를 이야기할 것이며, 전범국 일본을 엄중하게 지켜볼 것이다. 온라인에서도 사람들이 와글와글할 것이다. 일본 정부의 편지통에 수천, 수만 통의 편지들이 세계 각국에서 날아들 것이다.

확신한다. 그 1000번의 외침 너머에 희망의 문이 열리고 있음을. 1000번의 역사가 전쟁으로 인해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해방과 인권을 되찾아 줄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1000번의 역사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평화로운 세상을 물려줄 수 있는 세상을 열어줄 때까지 계속 이어갈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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