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9부터 3일간 부산 세계개발원조총회가 열렸다. 160여 개국 대표 등 3500여 명이 참석해 역대 최대 규모로 열렸다. 총회에서는 개도국 중심의 원조와 개발 등 새로운 형태의 국제 원조 방식을 제시한 ‘정치 선언문’을 채택했다. ‘정치 선언문’의 골자는 개도국의 개발 우선순위에 대한 주인의식 고취, 과정보다는 성과에 초점 부여, 포용적인 개발 파트너십 추구, 투명성과 책임성 강화 등이다. 이를 토대로 국제 원조체제가 지향해야 할 내용을 골자로 하는 ‘부산 선언(Busan Document)’이 공식 채택됐다. 이 ‘부산 선언’에서는 “원조 집행의 투명성과 개도국의 책임 강화 등 원조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국제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번 세계개발원조총회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개도국을 지원할 때 양성평등이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지적도 제기된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이번 총회의 양성평등 포럼 개회사에서 ‘개발 성과를 위한 양성평등 제고 및 여성의 역량 강화’라는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그는 “여자들에게 똑같은 경제적 기회를 제공한 국가의 경제성장률이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높다”면서 양성평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제는 개발원조 프로그램에 여성과 여아의 발전이라는 의제를 반드시 반영해 남녀가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면서 “더 많은 여성이 교육을 받고 기업 활동을 위한 소액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이제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를 위해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와 정보를 수집하고 표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 여성분야에 대한 효과적인 자원 분배가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힐러리의 이런 주장은 원조의 패러다임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개발원조의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을 논의하는 부산세계개발원조총회에서 ‘여성’이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미국의 과학사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란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라고 정의했다. 쿤에 따르면 하나의 패러다임이 나타나면, 이 패러다임에 포함된 갖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계속 연구·탐구 활동을 하는데, 이를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고 지칭했다. 이어 정상과학을 통해 일정한 성과가 누적되다 보면 기존의 패러다임은 차츰 부정되고, 경쟁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고, 항상 생성·발전·쇠퇴·대체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뜻이다. 사회 패러다임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남성 중심의 패러다임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발전, 대체될 수밖에 없다. 그 핵심에 여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 세계개발원조총회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은 개도국의 원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돼야 한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복지예산을 둘러싸고 논쟁이 치열하다. 이제는 예산의 문제도 복지를 넘어 여성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대폭 투입하도록 예산의 패러디임을 바꾸어야 할 시점이다. 그때만이 진정한 변화와 사회 발전의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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