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있었다 (4)

 

 

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성옥은 영영 바다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가로수에 기대었다가 나무에 등을 비비며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바람의 행방을 따라 바다 냄새가 몰려다니고 성옥의 코로 스며들면 불현듯 아버지 같아서 성옥은 사방으로 얼굴을 돌리곤 하였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너무도 뚜렷하게 아버지를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허공에서 성옥에게 기별하고 바다에서 성옥을 바라보는 게 틀림없었다.

온대진 바다는 집에서 가까웠다. 한나절 다녀와도 충분한 곳을 언제나 밥을 싸서 하루 종일 다니다 해거름에 돌아왔다. 아버지도 그랬지만 성옥이는 수영을 좋아했다. 바다가 아니라 읍내의 개울에서도 여름 한철 수영을 하고 놀았다. 압록강을 건널 때, 물살이 센 곳을 건널 수 있었던 건 온대진 바다와 읍내 개울에서 놀았던 추억이 준 선물이었다. 사흘이나 굶어서 지쳤을 때, 함께 건너던 여자는 물살에 휩쓸려 사라졌었다.

건너편 시모노세키 항에 색색의 불빛이 나타났다. 자동차의 불빛, 가로등, 네온 모두 잊었다는 듯이, 서둘러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성옥은 바다가 조금씩 어두워지는 것, 물빛이 검어지는 것, 파도 소리가 커지는 것을 들었다. 등 뒤로는 부쩍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자전거를 탄 사람, 운동복을 입고 달리는 사람, 무리 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아부지, 나는 가요.

성옥은 속으로 말했다. 그 순간 사방에서 육중하고 뻐근하게 밀려오는 소리가 느껴졌다. 그래 성옥아, 수고가 많았다. 성옥은 울음을 깨물고 웃었다.

아부지, 알았어요. 아부지 만났으니 마음 놓고 떠나요.

성옥이 아버지의 목소리에 대답했다. 이상했다.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해서일까? 성옥은 한결 개운했다. 가뜬하기까지 했다. 해변 찻길을 나비처럼 건넜다.

10m 쯤 지나서였다. 길가에 정갈한 느낌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門司港 出征의 碑

비석의 맨 위에 새겨진 제목이었다. 그 옆에는 군함에 오른 앳되어 보이는 병사들이 육지를 향해 쓰러질 듯 손을 흔들고, 육지에서는 바다로 빨려들 것 같은 모습으로 그들을 배웅하는 어머니들의 사진 동판이 박혀 있었다. 성옥은 더 이상 설명이나 해명이 필요 없는 그 사진에서 한동안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대충 이해한 내용은, 이곳에서 전선으로 떠난 병사는 200만 명, 그중 돌아온 병사는 100만이라는 설명이었다. 비석의 받침대 위에는 아직 시들지 않은 보라색 붓꽃과 월계관 상표가 붙은 작은 술병이 뉘여 있었다.

소식과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닌 붓꽃과 술은 1945년으로부터 2011년이 되도록 삭지 못한 그리움과 기다림의 부호, 암호 같았다. 비를 세우는 데 함께한 모지구의 유족연합회 부인부에선 폭력과 학살과 광기를 평화와 우호로 바꾸고 싶었을 것이다. 전선의 후방에 남아 공포와 슬픔과 그리움의 전쟁을 치렀을 어머니들. 그들이 그리움으로 토지를 일궈 파종하고 싶은 것이 평화일까…, 성옥은 생각했다. 

이곳을 떠난 아들들 중에 돌아오지 않은 절반의 빈자리를 채운 조선인들이 있었다는 걸, 평화를 갈구하는 부인부 어머니들이 알까?

성옥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속으로 물었다. 사람이 사는 곳엔 어디든 평화가 필요하고 자식을 낳은 어머니에겐 자식을 잃는 것이 죽음보다 못한 것도, 똑같을 것이었다. 그리움엔 차별이 없을 테니까.  

건너편 항구는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건너편, 시모노세키. 식민지 조선 땅에서 떠난 배가 닿은 곳이었다. 이곳까지 실려온 것은 공출이라며 거둬들인 곡식만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가보와 신주로 모시는 놋 제기(祭器)부터 무당의 무구(巫具)까지 쇠라면 모두 거둬들였다. 철길을 내어 광석과 곡물을 실어 날랐다. 전선에선 음식을 만들고 시중을 들고 욕정도 달래야 할 도구로의 여자도 필요했다. 이제 갓 피어난 꽃 같은 처녀들이었다. 급할 때는 아이를 낳은 새각시, 빨래하던 젊은 아낙네, 밭을 매던 며느리도 잡혔다. 

김정남이 24살 되던 해 늦은 봄, 골짜기 천수답에 모를 냈다. 할머니는 쑥에 밀기울을 버무려 찐 점심을 들고 논으로 왔다. 하늘이 도와서 논물이 잘박거리는 논바닥에 모를 심는 손자를 두렁에 앉아 지켜보았다. 정남이는 오늘따라 아주 작아 보이는 할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고 두렁으로 나가 점심을 먹었다. 날이 가물면 벼 한 포기 심지 못하고 심은 벼도 뿌리 내리지 못하는 논이었다. 그것도 쌀농사라고 가을이면 공출로 거둬갔다.

“할미만 없어두….”

할머니는 무청 김치를 집어 정남에게 건네며 중얼거렸다. 늦가을 김장을 거둔 밭에서 주워온 무청을 씻어 소금에 절인 짠지였다. 정남이는 할머니가 삼킨 뒷말이 무엇인지 다 알았다. 잘난 손자가 당신 없으면 대처로 나가 각시를 얻어 제대로 살 텐데, 그런 넋두리였다. 혼자서 천자문을 떼고 스스로 만든 대나무 피리를 익혀 토방에 앉아 피리를 불 땐 저게 사람인가, 의심스러워 할머니의 정신이 아뜩해지곤 했다. 거의 20년을 동네 깊은 골짜기 외딴집에서 살아온 할머니와 손자였다. 어쩌다 나뭇단이나 칡뿌리를 지고 장에 나가면 정남이가 할머니와 가난하게 산다고 보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저기 딴 천을 대고 기운 바지저고리를 입었어도 언제나 깨끗했고 표정은 구차한 데가 없었다.          

모를 심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정남은 눈을 뜨면서 다른 날과 다른 정적을 느꼈다. 정적 말고도 고요와 침묵, 묵직한 서늘함이 감돌았다. 정남은 어슴푸레한 방 안에서 할머니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봉긋이 솟아오른 이부자리. 할머니는 그대로였다. 아, 정남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편찮으신가? 순식간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정남에게 이런 할머니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때쯤이면 할머니는 언제나 부엌이나 뒤란에 있었다. 일 년 열두 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 같았다. 새벽에 일어나 하얀 사기 사발에 샘물을 떠서 장독에 놓고 치성을 드렸다. 무엇을 비는 치성인지 정남은 할머니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알았다. 할머니는 더 이상 자기 생에서 잃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었다. 남편을 잃고 갓 결혼한 외아들을 잃고 며느리가 떠나고. 

할머니는 숨을 쉬지 않았다.

스물네 살 정남은 이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숨을 거뒀다는 걸 알겠는데 왜 할머니가 일어나지 않는지, 왜 말하지 않는지, 왜 자기와 같이 먹고 잠자지 않는지, 왜 자신의 곁에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정남은 평생 잊은 적이 없다. 관부연락선에 바다를 건널 때, 지쿠호 탄광에서 갱이 무너져 죽은 동료의 검은 시신을 들고 나올 때, 그리고 화장한 뼈를 땅에 묻고 돌을 박아 표지를 할 때, 만경봉호에 실려 또 한 번 바다를 건널 때도, 그 후에도 그는 그날 아침의 충격을 잊지 못했다.

일곱 살이 되던 해 저 혼자 이십 리 길을 걸어 어머니를 찾아갔다가 매를 맞고 울지도 못하고 돌아온 정남, 길목에서 너울너울 자기를 기다리던 할머니를 보고 세상에 할머니보다 더 좋은 어머니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잊지 않았다. 어미를 지운 손자와 애틋해서 가슴이 저미던 할미가 부둥켜안을 때, 그들의 머리 위로 반딧불이 날고 더 높은 곳에 초승달이 파리했다. 멀리 별똥별이 지고 또 졌다. 

정남은 마을에 알리지도 않고 할머니를 집 뒷산에 장사지냈다. 잠자다가 불현듯 일어나 뒷산으로 올라가 묘 둥지를 어루만졌다. 혹시 추운지, 흙이 허물어지지 않았는지 할머니가 그곳에서 정남을 불러내는 것 같았다. 

칼을 찬 순사와 함께 구장이 정남을 찾아온 건 장사를 지내고 열흘이 안 되어서였다.

“할머니는 안 계신가?”

구장이 물었다. 방안을 힐금거렸다. 정남은 울었다.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스물네 살 청년이라곤 믿겨지지 않았다. 정황을 안 구장은 혼자 지내면 큰병 난다, 돈도 벌고 세상 구경도 하고, 장가도 가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정남은 그 길로 할머니를 가슴에 묻어 길을 떠났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일본이라고 했다. 세상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읍사무소 마당 창고에는 이미 조선 남자들로 꽉 차 있었다. 덮개를 씌운 트럭에 실려 대구로, 다시 기차로 부산, 부산항에서 관부연락선에 올랐다. 선실엔 같은 지방의 사람들을 따로따로 집어넣었고 불안과 공포, 험악함이 자욱했다. 배가 움직이기 전에 멀미를 시작한 사람, 일본말을 배우는 사람, 욕을 하는 사람 가지가지였다.

부산항을 출발한 배는 다음날 오전에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릴 때 두 사람은 이미 시체였다. 부두에선 닛쓰, 미쓰비시, 미쓰이 등의 창고에 나뉘어 갇혔다. 하루에 주먹밥 한 덩이가 주어졌다. 나흘 뒤에 그들은 같거나 다른 일터로 떠났다. 경상도나 전라도 땅보다 먼 북쪽 홋카이도로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남은 후쿠오카의 지쿠호 탄광지대에서 일하게 됐다.

<계속>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