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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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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제주 4·3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룬 첫 장편 역사소설인 ‘한라산의 노을’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은 소설가 한림화(61)씨. 제주가 고향인 그는 제주에 머물며 제주의 자연과 사람을 소재로 꾸준히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진정한 ‘제주 작가’다.

-줄곧 제주에 머무르며 제주의 자연과 사람을 소재로 작품활동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제주 하면 아름다운 자연경관만 떠올리는 분들이 많아요. 제주의 생활력 강한 여성을 대표하는 해녀도 아직까지도 구경거리로만 보는 분들이 많고요. 4·3사건의 의혹도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요. 제주 사람들의 실제 삶과는 매우 동떨어진 ‘메이저에 의해 규정된 마이너 제주’의 신화, 그것을 벗기는 일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1991년 ‘한라산의 노을’ 집필을 위해 필드워크(자료 수집)를 시작한 1980년대는 제주 4·3사건을 반란이나 폭동으로 보던 시각이 여전하던 때입니다. 4·3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우연히 4·3에 관한 연감을 접했는데, 당시를 체험했던 사람들의 말과 같은 점이 하나도 없었어요. 제주도민을 다 빨갱이로 묘사하고, 대한민국 민주주의국가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였습니다. 1948년 사건 이후 그 사이 조금씩 간격이 벌어지는 건 당연한데 ‘왜 그렇게 깊이 파이고 멀까’ 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규명해 보자 하고 달려든 게 10여 년의 세월입니다.”

-필드워크가 10년이면 그간 말 못 할 고초도 수없이 겪었을 듯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요.(웃음) 지금은 4·3이 일종의 권력이 되어 겪은 사람들도 신나게 말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내가 제주도민들을 만나 4·3에 대해 물으면 관에서 나와 나를 왜 만났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다 하더라고요. 그래도 ‘죽어도 나 혼자 죽는다’는 심정으로 제주 550여 개 마을 방방곡곡 안 들어가 본 곳이 없습니다. 직접 끌려가 고초당해본 적은 없지만, 간접 공포가 얼마나 심했겠어요. 필드워크 노트 보따리를 싸서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맡기는 치졸하고 우스운 짓을 10년을 했으니 삶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필사의 힘을 다한 작품, 지금 보면 어떤가요.

“사실 아쉬움이 많습니다. 제대로 쓴다면 대하소설로 쓰고도 남을 테지요. 차라리 제주의 상황을 직접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작가라면 소설가적인 상상을 동원할 수 있었겠지만, 내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역사가와 이야기꾼의 역할은 엄연히 다릅니다. 소설을 쓰려 하면 ‘누구네 어머니가 이렇게 당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떠오르는데….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내 세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위로합니다. 다음 세대는 해낼 수 있을 거예요.”

-20여 년 전 ‘자발적 미혼모’를 선언하며 제주 지역을 떠들썩하게 한 여성운동가로도 유명합니다.

“여성문화운동을 억세게 하는 과정에서, 지금 생각하면 절대 안 할 짓도 했던 겁니다. 제주는 자칫 잘못 보면 여성이 활개 치는 사회로 보이지만, 여성의 이데올로기는 찾아볼 수 없어요. 이론을 잘 알던 것도 아니었고 운동을 할 줄 알았던 것도 아니고. 그저 삶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회적인 불이익도 엄청났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좁은 지역사회다 보니 지금도 루머의 그림자가 왔다갔다 해요. ‘아이 아버지가 누구다’ 하는 식의 악성이에요. 가족에게도 많은 상처가 됐을 겁니다.”

-왜 이렇게 굳이 힘든 길만 걸어오셨나요.

“아주 작은 계기였어요. 너덧 살 꼬마아이 시절부터 그런 의문이 들었던 겁니다. ‘집안의 가례에서 왜 어머니와 우리 딸들은 제외되는가’ 하는 것 말입니다. 더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어린 남동생이 호주가 되는 모습을 보고는 더욱 놀랐어요. 어머니는 유순하고 부드러운 어른이셨지만 참 똑똑하셨던 것이, 내가 그리 물을 때마다 ‘그럼 공부해서 그거 고치라잉?’ 하셨지요. 나는 다만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여성이 좀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었으면 했던 겁니다.”

-비혼모로 아이를 키우는 일은 현대사회에서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머니가 정정하실 때는 생활자금을 걱정해본 일이 없어요. 지역 언론사 기자인 아이 아버지도 양육비를 보탰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병환으로 쓰러지시면서 생활자금이 끊겼어요. 그전까지는 나 하고픈 공부하고 글 쓰면 됐지만, 이후에는 지명사전이나 마을지부터 학술 집필까지 청탁이 들어오는 것은 다 썼습니다. 다행인 것은 오래 공부한 것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소설 창작은 멀어졌지만 말입니다.”

-다시 창작활동에 불을 지피고 싶지는 않은지.

“물론입니다. 내가 ‘작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았다면 생을 끝맺음 할 때까지 작가로서도 충실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4·3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나까지 물고 늘어질 필요 없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더욱 그 비극적 사회현상도 서정적으로 색다르게 써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많습니다.”

-제주작가회의 회장직도 맡고 있습니다.

“회장직 권고에 못 이겨 수락한 이유는 작가로서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동료와 후배들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니 동냥을 해도 떳떳이 할 수 있고 모든 일에 의욕이 생겨요. 다만 작가의 복지문제는 내 힘으로는 달걀로 바위 치기,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쉽습니다. 문학은 모든 예술의 바탕인데, 작가는 최소한의 건강보험과 최저생계비도 보장 받지 못하지요. 길, 빌딩, 광장의 네이밍 작업 등 작가를 이용할 곳이 얼마나 많은가요. 작가들을 한껏 이용해 먹고 대신에 우리에게 사회보장을 해달라는 거예요. 후배들이 맘껏 활개치고 활동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소설가 한림화씨는

1950년 제주 출생. 1973년 ‘가톨릭시보’ 작품 공모에 중편  당선. 1987년 무크지 ‘문학과 역사’에 중편 발표. 현재 제주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고, 민족문화작가회의, 제주작가회의, 한국민족예술인 총연합회 등 여러 단체를 통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한라산의 노을’‘꽃 한 송이 남겨놓고’‘아름다운 기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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