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여성주의 희곡작가 엄인희(1955~2001)는 오래된 관습과 사회제도가 만들어 놓은 한 여인의 기구한 일생을 담은 희곡 ‘작은 할머니’를 선보였다. 서울연극제 초연 당시 전회 만원을 이뤄 화제를 모았던 이 작품이 최근 대학로에서 다시 공연되고 있다. 당시 연출을 맡았던 강영걸씨가 이번 공연에도 나서서 지나간 세월에도 녹슬지 않은 사실주의 대표 연출가의 무대예술을 선보인다.
제목은 ‘그 여자의 소설’(극단 완자무늬)로 바꿨다. 한 여자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모든 여성의 이야기라는 연출가의 해석이다. 작품 속 이야기는 흘러간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더욱더 깊은 감동을 준다.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극은 우리 모두의 슬픈 상처인 동시에 아직도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한 아픈 현실과 마주한 또 다른 희망의 이야기다.
배우 성병숙씨는 씨받이 작은댁으로 열연한다. 설움과 아픔을 겪으며 참고 인내한 긴 세월을 시집가는 손녀에게 옛 추억을 떠올리듯 잔잔히 들려주는 할머니의 정감어린 마음을 섬세한 대사와 연기로 전달한다. 작은댁 할머니의 아픈 과거는 남편 대신 가정을 이끌어가며 모성으로서의 생명력을 피워내는 어머니의 장엄한 삶을 바라보게 한다.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불 좀 꺼주세요’ ‘아름다운 거리’ 등 수많은 흥행작과 더불어 진정한 리얼리스트라 불리는 거장 강영걸 연출은 여성주의의 날카로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지닌 엄인희 작가의 작품을 탁월하게 해석한다. 작품을 정확하게 파악해 행간의 섬세한 상징을 끄집어내는 치밀한 연출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
사라진 봉건사회의 축첩제도와는 다른 모습으로 아직도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남아선호사상, 가부장제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여전히 고단한 여성들의 삶과 우리 모두의 가족사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지한다.
연극 ‘그 여자의 소설’은 27일까지 서울 대학로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에서 열린다. 티켓은 전석 3만원. 문의 좋은공연 02-743-9227, www.makegoodplay.com
-‘그 여자의 소설’(원제 ‘작은 어머니’)을 다시 선뵈는 이유는.
“최근 대학로의 작품 경향이 번역극이거나 대중적인 뮤지컬·코미디극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어 아쉬웠다. 연극이 가벼워지는 사조에서도 제대로 된 연극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고 엄인희 작가와 각별한 인연이었다고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후배였지만 연극에 있어서는 동지의 입장이었다. 작가로서는 배우들이 테크닉이나 형식에 의해 연기를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최선을 다해 맡은 배역의 인생을 생각하고 하나씩 짚어가며 해야 할 정도로 짜임새 있는 작품을 선보였다.”
-주연 성병숙은 어떤 배우인가.
“민감하고 금방금방 아픔을 느껴서 나타내는 배우다. 그러면서도 개인적으로 힘든 세월을 견뎌낸 내공이 느껴진다.”
-연극에서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은가.
“나의 모든 작품은 ‘인간’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보여줄 것이다.”
-2005~2007년 세 번에 걸쳐 암 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건강은 어떤가.
“그냥 근근이 버틴다. 늙었다고 딱지 놓지 않고 붙여주는 것이 고맙다.”
-‘근근이’라고 하기에는 작품 활동이 왕성하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나.
“할수록 점점 더 목말라져서 그렇다. 서양의 연극에 열광하는데, 그걸 어떻게 우리 정서화하느냐에 관심이 많다. 우리 사회의 어디가 병들어 있는지를 진단해 근본적인 치유책을 내놓는 작품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우리 굿이니, 사물놀이니, 연희극이니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 것도 문학에 있어서 연작소설처럼 이런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 여자의 소설’에서 작은할머니 역할을 맡은 의미는.
“20대부터 70대까지 연기하는 것은 물론, 연기자가 연기할 수 있는 감정의 텍스트는 한 번씩 다 하게 된다. 전쟁, 첩살이, 아들과의 재회 등 매 신마다 감정이 다 다르다. 여배우라면 한 번쯤 욕심낼 만한 역이라서 영광이다.”
-지난 10월 안동에서 초연을 올렸는데, 반응이 어땠나.
“아직까지 가부장적인 전통이 남아 있는 도시여서인지 호응도가 컸다. 흥미로웠던 점은 작품의 시대를 겪지 못한 세대들은 신기하고 재밌어 하더라는 점이다. 10년 전 공연 때는 여성 관객들이 사람 대접 못 받는 작은할머니의 모습에 함께 분개했다고 하는데 큰 변화다.”
-강영걸 연출가와의 작업은.
“작업에 임할 때는 철저하고 호랑이 같으면서도, 과정에서 인간적이고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신다. 연기에 있어서 많은 자극이 된다.”
-연기할 때 가장 유념하는 점은.
“이전에 작은할머니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과는 다른, 나다운 캐릭터를 만들려고 한다. 나는 철없고 어리바리하고 만날 무언가를 잘 까먹고, 그 대신 귀여운 사람이다.(웃음) 작은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이렇게 설정했다.”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기계적이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대에 가장 아날로그적이고 인간의 심성을 건드리는 작품이다. 가장 연극다운 연극, 우리말이 살아있는 정통의 연극을 볼 수 있을 거다. 한국적인 고전의 맛을 기대해 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