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세 민건식 할아버지가 쓴 ‘88청춘’은 늙어가는 청춘들을 위한 종합 백신과도 같은 책이다.
“모든 일에서 은퇴한 희수(喜壽) 때는 어느 틈에 흘러간 세월을 생각하며 ‘아무 소용없는 인간이 되었구나’ 하는 허무감에 빠져 무기력한 나날을 보냈다.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또 흘러 88세 미수(米壽)의 나이가 됐다. 요즘은 77세 때 허무와 고독과 실의에 차있던 때와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새로운 흥미와 욕구 그리고 목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88청춘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21쪽)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우리에게 ‘후회’라는 단점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의 과거를 더듬어 동심의 세계로 나아갈 때 복잡한 현실에서의 문제를 떠나 자기의 내면에 조용히 침잠할 수 있는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다.” (21쪽)
“흔히 의사들은 자기 가족의 병에 대해서는 소홀할 때가 많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또는 괜찮아 하고 희망적인 생각만 하다가 때를 놓치고 당황하게 된다. 나도 그런 가운데 내 처를 잃었다. 내가 잘못해서 죽였다는 죄책감에 고통을 이겨낼 수가 없다. 집에만 있어주면 언제나 든든하고 마음이 놓였는데 이제는 빈집에 혼자 들락날락하게 되었으니 두려움이 앞선다. 물고기가 물 밖에 나온 듯한 심정이다.” (249쪽)
저자가 지나간 날을 돌이켜보는 마음으로 적어 내려간 글들은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찬란한 기쁨을 맛보았던 순간뿐 아니라 가슴 먹먹한 슬픔을 느꼈던 순간까지 가감 없이 담아 ‘인생의 진정한 행복’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까지 던진다.
한편 책에는 저자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신동헌(85) 화백의 생생한 삽화 69컷이 삽입되어 내용을 한층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