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5.5㎞, 5시간30분 소요
간만에 버스 2대가 동원되었다. 작년에 몇 번 보고 만나지 못했던 반가운 얼굴들이 다시 등장했다. 아이들만 보내고 함께 하지 못했던 엄마 아빠들도 용기를 냈다. 총 인원 61명! 새가 잠을 자는 고개라는 뜻을 가진 조침령(鳥寢嶺)의 새벽이 사람들의 훈기로 들썩들썩하다. 산을 타는 일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혼자 산길을 걷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일이라고 느꼈다. 마음 맞는 두셋이 오붓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일도 재미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여럿이 서로 격려하고 응원하며 함께 산행을 하는 일이야말로 즐겁고 뿌듯한 경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해와 막힘없이 서로 통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말하기를 가르치는 아나운서 유정아의 책 ‘말하기 강의’에서는 소통의 주체가 되는 자아를 넷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나도 알고 남도 아는 ‘열린 자아(open self)’, 둘째는 나는 모르고 남은 아는 ‘눈먼 자아(blind self)’, 셋째는 나는 알지만 드러내지 않아 남은 모르는 ‘숨겨진 자아(hidden self)’, 그리고 마지막은 나도 남도 모르는 무의식 속의 자아인 ‘미지의 자아(unknown self)’이다.
오랫동안 외톨이였던 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힘겨웠다. 쉽게 눈 맞춤을 하지 않을(혹은 못할) 정도로 주위에 단단히 벽을 두르고 낯가림을 했다. 나는 오로지 나만이 아는 ‘숨겨진 자아’ 속에 갇힌 채 끊임없이 외롭고 두려웠다. 그래서 반대급부로 더 씩씩한 척 대담한 척 강하고 너그러운 척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처럼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 마음의 민낯을 보여주지 않으려 심리적 화장(psychological make-up)을 하는 것은 진정한 소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통의 가장 기초적인 덕목은 뭐니 뭐니 해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자연스럽게 펼쳐 보이는 솔직함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건강한, 지속 가능한 소통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서부터 시작된다. 나 자신에게 비굴하거나 오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산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지르밟으며 누구나 부족할 수 있다고, 인간이니까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고, 고의가 아닌 실수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되뇐다. 구름이 내 어깨를 다독인다. 바람이 내 손등을 쓸어준다. 산이 나를 이끌어 품어준다. 대단히 멋있고 훌륭하진 않지만 반성과 성찰을 할 줄 알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인 나와 가만히 눈을 맞춰본다. 나와 나의 소통이, 깊은 눈 맞춤이 이루어지는 순간 비로소 세상과도 똑바로 마주볼 수 있을 것이다.
평탄한 길에 오랜만에 온 사람들도 힘들어하지 않고 무난히 산행을 마치려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백두대간 종주라는 것은 ‘평탄’이나 ‘무난’이라는 말과 인연이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김없이 복병이 나타났다. 단목령의 장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엄마 셋과 아들 넷이 ‘모자 팀’을 이뤄 즐겁게 하산을 하는 길에 남쪽 탈출로인 진동리 어귀에서 무언가 심상찮은 기운이 어른거리더니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 터졌다.
“산림청에서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산림유전자원보호림 입산통제구역에 무단으로 출입했습니다!”
젊은 산림청 직원 한 사람과 세 명의 주민으로 이루어진 단속반이 길을 가로막고 우리의 ‘불법’을 지적했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가운데도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백두대간상의 출입통제구간 중에서도 지리산의 노고단-코재-종석대 구간, 속리산의 문장대-밤티재-늘재 구간, 그리고 단목령-점봉산-한계령 구간은 산악인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진짜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곳들’이기에 우리는 준법정신을 발휘해 단목령에서 발길을 돌렸는데….
이 때아닌 날벼락은 슈퍼맨처럼 나타난 대장님의 ‘게시 의무’에 대한 지적과 이제 백두대간 완주까지 세 번 남았다는 읍소로 다행히 해피엔드로 마무리되었다. 어쨌든 모르고 저지른 죄라도 죄인지라, 우리는 ‘미래 세대를 위한 자원의 보고: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정독하며 교육을 받는 걸로 갚음을 하였다. 산에서 받아온 좋은 에너지를 느닷없는 대거리에 쓴 터라 조금 침울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함께 고민하며 문제를 헤쳐 나가는 동행들이 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인제 산골짜기에서 양식한 송어회를 안주 삼아 찬술을 마실 수 있었다.
같은 산을 넘은 사람들과의 눈 맞춤은 언제나 즐겁다. 그들은 내가 걸어온 길을 알고 나 역시 그들이 지난 고개를 안다. 내 무릎만큼 그들의 무릎도 아플 것이고 그들의 고단함만큼 나도 고단하다. 공감과 이해 그리고 연민으로부터 비롯되는 깊디깊은 눈 맞춤. 그토록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소통’이라는 말이 조금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