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7.15㎞, 10시간 소요
“길벗여행사 버스를 보고 행복해하고, 남자애들보다 먼저 옷을 갈아입었다고 즐거워하고, 산 정상에서밖에 느낄 수 없는 경치와 바람을 이제 딱 다섯 번만 산행을 하면 못 느낀다. 왠지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든다.”
지난번 함백산에 다녀온 아이들의 산행기를 읽다가 중2 지혜의 글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글의 행간에서 묻어나는 안타까움과 서운함이 마음을 찡하게 울린다. 지혜는 지난 산행 며칠 전에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이틀 동안 입원까지 했는데, 병원 침대에 누워서도 산에 가지 못할까봐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했단다. 처음 산행을 시작했을 때 새벽마다 산멀미에 시달리며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계집아이는 어느덧 온데간데없다. 열병마저 거뜬히 물리치고 씩씩하게 산을 오르는 지혜는 명실상부 멋지고 당당한 산꾼이다.
나 또한 얼마 남지 않은 일정이 아쉽다. 그래서 슬슬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산행을 일상화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지난 주말 동네 뒷산인 광교산에 올랐다. 오후에 소나기 예보가 있어 망설였지만 웬일로 방학 막바지를 즐기며 늦잠을 자던 아들이 떨쳐나서고 지금껏 우리 산행을 뒷바라지하던 동생까지 합세하는 바람에 졸지에 가족 산행을 하게 되었다. 해발 582m의 야트막한 육산인 데다 정상인 시루봉까지 겨우 7㎞니 왕복 4시간 정도면 거뜬하리라 하였다.
산에는 벌써 가을 기운이 깃들어 있다. ‘철이 든다’는 말이 ‘절기를 안다’는 뜻이라는 해석을 생각하면, 우리는 산에서 하늘의 이치를 온몸으로 느끼며 철이 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고개에서 두로봉까지 펼쳐진 평탄하고도 고즈넉한 마루금을 거쳐 국립공원 오대산에 접어들었다. 상왕봉을 향해 가파른 오르막을 낑낑대며 올라가는데, 문득 배낭에 매단 휴대전화가 울린다. 내 근황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이제 주말에 연락을 하지 않는다. 당연히 산에 갔으리라 여기며 어쩌다 비라도 올라치면 어두운 하늘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본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그 고운 마음들의 응원이 나를 무사히 여기까지 데려다놓은 것이리라. 그런데 어떤 영문 모르는 이가 이 시간에 내게 전화를 할까?
“혜준 엄마! 지금 어디쯤 오고 있어요?”
뜻밖에도 선두에서 산행을 하던 인걸 아빠의 목소리다.
“지금 상왕봉 올라가는 중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혹시 비상 상황이 생겼나 싶어 다급하게 되물었다. 그런데….
“아, 그럼 올라오다가 앉은걸음으로 건너야 하는 커다란 나무 두 개를 지나서 길을 가로질러 쓰러져 있는 나무 하나를 찾으세요. 그 나무 왼편에 보면 금강초롱이 피어 있어요.”
이거야말로 보물찾기다! 고마운 전화를 끊고 나서부터 나는 앉은걸음으로 건너야 하는 나무 두 그루와 길을 가로질러 쓰러져 있는 나무를 찾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동행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두로봉에서 먼저 올라오는 바람에 모두 헤어졌으니 이 보물은 온전히 내 힘으로 찾아야만 한다. 행여나 놓칠세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노라니 어린 시절 소풍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나는 보물찾기에 재주가 없는 아이였다. 다른 친구들의 눈에는 잘도 뵈는 보물(경품의 이름이 적힌 종이쪽지)이 내 눈에만은 기어이 띄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풀숲을 헤치고 나뭇등걸 주위를 뒤졌다. 기껏해야 공책이나 연필, 크레파스 정도가 경품의 전부였지만 ‘보물’들을 영영 찾지 못했을 때의 실망과 상심은 꽤나 컸다. 하긴 덕분에 내기나 당첨 따위에는 아예 소질이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아 허투루 요행수를 바라지 않게 되었지만, 이번에만은 나도 ‘보물’을 찾는 행운을 잡고 싶었다.
한참을 긴장해 걸어도 표점이 되는 나무들이 나타나지 않아 혹 지나쳐버린 건 아닐까 조바심을 치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순간, 마침내 내 눈앞에 앉은걸음으로 통과해야 하는 나무들이 나타났다. 가슴이 두근두근, 곧 만나게 될 보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빠르게 뛰었다. 달리다시피 산길을 헤쳐가 길 한가운데 쓰러져 누운 나무를 발견했고, 결국 나는 만났다. 아름다운 보랏빛으로 향기롭게 핀 한 송이 보물, 금강초롱을!
사진을 찍고 살짝 꽃잎을 만져보고 킁킁 향내도 맡아보았다. 하지만 갈 길이 아직 먼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그 보물의 곁을 떠나기가 힘들었다. ‘한반도 야생화의 진객’이라고 불리는 금강초롱은 중부 및 북부 고산지대 깊은 숲에서 자라는 희귀 보호종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보물을 만나는 기쁨을 나눠주고 싶어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쫓아 올 이들을 기다렸다.
뒤따라온 지혜 엄마와 주원 엄마에게 보물을 양도하니 절로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마음만큼 귀한 보물이 어디 있을까. 그 보물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크고 많아지니 무엇이 그보다 더 값질 수 있을까.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화려하게 치장되어 공연히 낯설고 열없는 적멸보궁과 상원사를 지나며 나는 다만 내 마음의 보물에 합장하고 경배했다. 그 보물이 반짝일 때마다 한 세상이 피고지고, 어디서 불어왔는지 알 수 없는 바람에 운명이 꿰뚫린다. 산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산과 그곳에서 만나는 것들이 그립다. 어쨌거나 더 이상 보물찾기에서 빈털터리로 돌아설까 봐 안절부절 마음을 졸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진실로 그것들이 어디 있는지 이젠 분명히 알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