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자치부 시절인 1999년,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외국 공무원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한 말레이시아 여성 관리자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양국의 여성 공무원 현황과 관리직 육성 방안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한 여성이 말레이시아엔 고위공직 수행 매뉴얼이 잘 돼 있어 여성이 관리직·고위직에 올라도 업무를 수행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공직 수행 매뉴얼이란 게 없었다.

돌이켜 보면 노태우 대통령 시절, 내각에 여성 장관은 오로지 정무장관(제2)뿐이었다. 당시에는 장관 지명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없던 때였으니 장관으로 지명되면 청와대에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곧바로 해당 기관에 부임해 취임식을 가진 후 집무를 시작한다. 대통령이 주재하고 각 부처 장관들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서 신임 국무위원으로 인사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안건은 어떻게 다루는지 궁금하지만 상상으로만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각에 다른 동료 여성 장관이라도 있으면 서로 물어보고 의지가 될 수 있으련만 여성 장관은 홀로인 데다가 경험도 없으니 의전이나 정보 등에서 소외되지 않을까 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 장관을 지낸 여성도 희소했으니 어디 마음 편히 물어볼 데도 마땅치 않았다. 장관직 수행을 돕는 매뉴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어디에도 없었다.

예를 들면 현충원 첫 참배 시 장관으로서 의전행동 지침이 어디에 친절하게 나와 있지도 않았다. 헌화는 어떻게 하는지, 흰 장갑을 끼는지, 향을 올리는지, 절은 몇 번이나 해야 하는지, 방명록에 방문 소감을 어떻게 남겨야 하는지 등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장관을 보좌하는 직원들은 현충원 측의 안내를 받으니 현장에서 그에 따르면 될 것이라고 막연히 조언해드리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은 작고하신 조경희 초대 장관을 비롯해 김영정·이계순·김갑현 장관은 여성으로서 국정 최고의 자리에 홀로 있으면서 없는 길을 내고 모르던 길을 닦으신 분들이다. 이 시기에 정무장관(제2) 주재하에 중앙 각 부처 및 지방 각 시·도의 관리자급 여성 공무원 간담회가 체계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각 기관에 흩어져 일하는 여성 공무원들이 관리자로서 정보와 경험을 나눌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장관을 위한 공직 매뉴얼이 개발된 것은 2004년 참여정부에 들어와서다. 중앙인사위원회는 공공부문에 대한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신임 장관들이 공직사회에 효과적으로 적응하고 나아가 장관으로서 직무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길잡이로 ‘고위공직자 공직 적응 매뉴얼-장관직을 중심으로’를 발간했다. 여성 장관에겐 더욱 유용한 매뉴얼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