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에 끌려가 ‘위안부’ 고초, 두 아이도 남에게 줘
김학순 할머니 이야기 듣고 재판에 대해 생각

 

사진=김수진 객원기자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cialis coupon free   cialis trial coupon
사진=김수진 객원기자
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cialis coupon free cialis trial coupon
제 66주년 광복절을 이틀 앞두고 제10차 일본국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에서 기자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났다. 역사 속 주인공을 직접 만나는 건 무척 귀한 일이었다.

할머니들은 아픈 기억을 가슴에 묻고 연단에 섰다.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없는 응어리를 안고 한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기자는 잔인하게도 할머니들의 그 응어리에 말을 걸었다.

비켜갈 수 없는 역사를 말하며 할머니들은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남은 인생을 내놓았다. 강단에 선 할머니의 강연, 관련 자료, 간단한 인터뷰와 취재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삶을 재구성했다. 이 재구성을 통해 한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전하고자 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상처

강단 맨 앞줄에 앉은 연로한 할머니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20년째 투쟁 중이다.

그중 유난히 흰머리가 눈에 띄는 할머니가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강단에 올랐다. 유일하게 일본에서 거주하는 89세의 송신도(사진) 할머니다. 9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담은 할머니의 몸은 작았지만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눈빛과 호령하는 목소리는 나이를 잊게 했다. “이렇게 살아 있으니 한국에도 오고 (여러분을 만나서) 좋다”며 송 할머니가 일본말로 말문을 열었다. “나는 아이도 없고, 돈도 없다. 목숨만 남았다. 이 목숨 다할 때까지 일본에 책임을 물을 것이다.” 카랑카랑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강당에 울렸다.

“송 할머니로 인해 많은 일본인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어려운 결정을 했다. 회피하거나 도망가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일본인에게 보냈다” “사실상 한국보다 더 가부장적인 일본에서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가 전면에 나서기는 어렵다. 송 할머니만이 할 수 있는 상황이 있어 이들의 본보기가 된다” 이번 아시아 연대회의에 참석한 일본인들의 송 할머니에 대한 생각이다. 일본의 ‘위안부’ 문제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은 송 할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열여섯 소녀였던 송 할머니는 일본군에 의해 중국으로 끌려가 위안부가 됐다. 송 할머니는 이날 강연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남에게 이야기도 못하고 슬프게 살아왔다. 정말 너무 힘들었다. 이제 눈물도 다 말랐다”고 말을 흐렸다. 

2002년 7월 23일 일본국회 참의원 내각 위원회(이하 증언)에서 할머니는 이와 관련한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속아서 위안소로 끌려간 것은 열여섯 살 때였습니다. 아직 철도 없고 소꿉놀이를 하는 그런 어린아이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성병 검사대에 올랐을 때는 창피하고, 무섭고, 아프고…. 검사 기구는 안 들어가고, 내가 하도 날뛰니까 군의가 엉덩이를 찰싹 때려서 내리고 했습니다. (중략) 날마다 얻어맞아서 뺨에는 굳은살이 생겨 이제는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가 않아요. 고막이 터져서 귀도 한 쪽밖에 안 들립니다. 위안소에서 한 문신이 부끄러워서 목욕탕에도 못 가고요. 그래도 살아남은 것만이라도 다행이라고 해야겠지요.”

송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전쟁터에서 기를 쓰고 살아 돌아왔지만 다시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같은 증언에서 송 할머니는 “옆에 있던 위안소에는 소독약을 마시고 자살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아파서 군인을 거절하는 바람에 살해된 여자도 있었습니다. 공습 때문에 죽은 여자, 졸병하고 같이 죽은 여자도 있었습니다. 같이 죽어도 졸병의 뼈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조선의 여자는 죽어도 고향에 못 돌아갑니다. 그냥 거기서 구멍 파고 묻힐 뿐이지. 지옥과 같은 위안소에서 죽어 그냥 묻히면 그만인, 죽어도 고향에 갈 수도 없는 조선의 여자들은 정말 불쌍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 와서 바다로 뛰어들어 죽으려고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가족도 없이 홀로 지낸다지만 그에게도 사실 아이가 있었다. “전쟁터에서 일본 군인의 아이를 둘 낳았지만 위안소에서는 못 키워서 남에게 맡겼습니다. 할 수 없이 한 일이기는 하지만 아이를 버린 탓에 벌을 받는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옵니다. 중국에서 혈육을 찾는 고아들이 일본에 올 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살펴보는데 모르겠어요.” 그는 증언에서 어쩔 수 없이 버릴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을 그리워했다. 

송 할머니가 일본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광복 후 일본군 병사의 결혼하자는 말을 믿고 그를 따라 후쿠오카에 온 것이었다. 그 병사는 하카타항에 도착하자마자 “미군의 매춘부라도 하라”는 말을 남기고 송 할머니를 버렸다.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 갈 수 없었다

고통 속에서 삶을 꾸려나가던 송 할머니는 재일동포 하재은씨를 만났다. “악몽에 시달리며 신음하는 나를 하재은이 깨워주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가 믿고 의지했던 유일한 ‘남편’이었다. 그러나 하재은씨가 병을 앓게 되며 할머니는 공장일, 막노동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1972년부터는 ‘생활보호금’을 신청하게 됐다. 그 뒤 할머니에 대한 차별은 더 심해졌다. “나이 먹어 ‘경로의 날’에 이웃 노인들에게는 방석이 나눠졌는데 나에게는 주지도 않았아요. 몇 년째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이런 것까지 차별하는 거예요”라는 증언만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1982년 하씨는 사망하게 된다.

송 할머니가 법정 투쟁을 마음먹은 것은 하씨가 사망하고 10년 뒤인 1992년이었다. 1991년 12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힌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원고가 되어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제소하는 모습이 일본 방송에 나오며 일본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시민단체 중 ‘종군위안부문제우리여성네트워크’에서 운영하던 ‘위안부 110’번으로 일본 미야기현에 위안부 피해를 당한 사람이 있다는 신고 전화가 왔다. 관계자들이 찾아간 사람이 바로 송 할머니였다. 그는 김학순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재판에 대한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아직 결정을 못 하던 차에 한 기자가 먼저 송 할머니의 고민을 세상에 알렸고 결국 할머니는 “하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됐다.

“재판에 졌어도 마음은 진 게 아니오”

1993년 1월 23일 일본에서는 ‘재일 조선인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으로 시민단체가 결집해 송 할머니와 그 해 4월 5일 재판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10년의 긴 싸움이 시작됐다.

재판을 시작하고 6년 만인 1999년에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처음으로 기각 판결을 받게 된다. 첫 기각 판결 후 할머니가 많이 울고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1년 후 고등법원에서 패소했을 때는 할머니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격려하기 시작했다. 2003년 3월 28일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상고 기각 판결(패소 확정)을 받으며 할머니는 오히려 더 강해졌다.

송 할머니는 마지막 재판보고집회에서 “여러분, 우리는 재판에 졌어도 마음은 진 게 아니오. 미야기현으로 돌아가도 큰 배에 탄 것처럼 안심하고 여러분 얼굴 보면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살아나갈 테니 여러분 아무쪼록 잘 부탁합니다. 고마워요”라고 인사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파악된 한국인은 총 234명이지만 7월 현재 70명만이 생존해 있다. 이 할머니들이 목숨이 다해 싸우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독일은 전 세계가 감시하고 질타하는 속에서 전쟁범죄에 대해 사과하고 철저한 전범 재판이 이뤄졌으나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세계는 관대하다.

일본이 다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제66주년 광복절에 송 할머니를 비롯한 현존 피해자 70명, 자신의 과거와 존재를 숨기고 살아야 했던 더 많은 할머니들에게 “건강히 오래 사세요”라는 말밖에 전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할머니들이 목숨을 걸고 말한 역사에 우리가 힘을 보탠다면 더 나은 역사가 펼쳐질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희망에 더 큰 희망이 더해지길 간절히 바란다.

도움말=재일조선인위안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양징자씨, 도서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재일조선인위안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2011), 제10회 아시아연대회의 송신도 할머니 기자회견, 강연 내용 등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