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령 - 촛대봉 - 싸리재 - 묘적봉(1148) - 도솔봉(1314.2) - 삼형제봉 - 죽령(경북 영주시 풍기읍 - 충북 단양군 대강면)
총 20.18㎞, 8시간/ 12시간 소요
“제발, 나를 믿자!”
얼음물의 무게로 배낭을 걸머진 어깨가 빠질 듯 아프다. 그래도 촛대봉을 넘어 싸리재를 지나 묘적봉에 이르기까지는 어지간히 버틸 만했다. 날씨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날이 밝아서도 안개가 걷히지 않아 마루금으로 내리꽂히는 햇살을 피하는 한편, 지난해 올해 통틀어 처음으로 비를 맞지 않고 여름 산행을 할 수 있었다. 간만에 날씨의 도움을 받았다며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낄낄거렸다. 묘적봉까지 도상 거리로 4분의 3을 온 셈이니 앞으로 4분의 1만 더 가면 된다며 앞으로 펼쳐질 일들은 까마득히 모른 채 희희낙락했다. 하지만 언제나 확고한 진실 하나는…, 가보지 않은 산과 겪어보지 못한 삶은 절대 함부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미리 귀동냥하기로 꽤나 험하고 가파르다고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멀쩡했던 육산이 정상부에서 갑자기 골산이 되어 우뚝 막아서는 바람에 운행한 지 6시간이 넘어 얼마간 지쳐 있던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위험한 바위 구간에는 소백산 국립공원 측에서 계단을 설치해 두었지만 그 경사라는 것이 지금까지 내가 본 계단이란 이름의 층층다리 중에 가장 급하고 심하다. 한 층에 발을 디디고 서니 다음 층이 가슴께에 와서 닿는다. 때마침 안개가 걷혀 따가운 햇살이 정수리를 짓쪼기 시작하면서 등줄기를 타고 땀이 줄줄 흐른다. 그래도 정신없이 기어오르고 기어 내렸다. 오직 그 몸짓밖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산행이 10시간을 넘어가면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열이 오른 발가락과 발바닥은 따가운 비명을 지르고, 바위를 짚느라 간힘을 쓴 팔은 께느른하고, 홧홧한 지열에 숨이 막히며 정신까지 몽롱하다. 고통스럽다. 왜,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아득바득 산을 타야 하나, 그만 손을 들고 항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중3 아이들의 철학 과목 1학기 기말고사 서술형 문제는 ‘고통은 가치가 있는가?’였다. 미리 예상 문제가 나온지라 시험 공부 겸 아이들의 생각을 알아보고 싶어 지지난번 산행이 끝난 후 아이들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저는 고통보다는 즐거움을 택하겠어요. 고통은 어쨌거나 고통일 뿐이니까요.”
쾌락주의자 인걸이가 내놓은 의견에 슬며시 태클을 걸어본다.
“하지만 세상엔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고통을 겪어보지 못하면 남의 고통을 이해하기 힘들지. 그래서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잖아. 그건 어떻게 생각해?”
일단 인걸이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해놓고 다음으로 윤진이의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고통과 시련을 겪으며 강한 사람은 더 강해지지만 대부분의 약한 사람들은 파괴되고 망가지기도 하거든. 그건 어떻게 생각해?”
이 아줌마가 뭘 어쩌자는 거야?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 중3 아이들을 바라보며 바로 그 혼란 속의 고민이 그들을 성장시킬 거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고통은 정말 가치가 있는가?
12시간의 산행을 끝내고 나니 온몸이 만신창이다. 어느 바위를 기어오르며 삐끗했는지 오른쪽 허리께가 시큰거리고 주인을 잘못 만나 시달리는 발은 벌겋게 퉁퉁 부어올랐다. 쉬는 동안 산모기의 습격을 받아 등판에는 따갑고 가려운 북두칠성이 돋았다. 하지만 죽령 휴게소에서 시원한 소백산 막걸리 한 잔을 받아들고 후미를 기다리노라니, 그래도 좋다. 여전히 행복하다. 이렇게 힘든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다.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 가슴이 뿌듯하다.
기실 나는 좀처럼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자기학대형 완벽주의자에 가깝다. 한때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하자’는 신조를 되뇌며 살았다. 그런데 그것은 어쩌면 가당찮게 나 자신의 능력을 너무 높게 산정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기껏 애를 써 무언가를 이루고도 더 잘할 수 있는데 못 했다고 스스로를 타박했다. 열심히 노력해 일정 부분의 성과를 거두고도 한 번도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스러운 충일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산에서는 다르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내가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썼다. 더 이상 잘할 방법도 없다. 무사히 그리고 즐겁게 목적지에 닿았으면 그만이다. 그 단순하고도 명쾌한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이자 자부심을 주는지, 내게 그토록 큰 선물을 준 산은 모를 테다. 험산이었기에 더 오래 기억될 것이다. 고통을 견디고 이겨낸 만큼, 나는 조금 더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