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 백봉령 - 생계령 - 석병산(1055) - 삽당령/ 닭목재 - 고루포기산(1238.3) - 능경봉 - 대관령(강원 정선군 임계면 - 강릉시 왕산면 -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총 31.45㎞, 8시간/ 7시간 소요
아무리 철저히 몸 관리를 해도 영 아프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산을 타기 시작하면서 일 년에 두어 번쯤 크게 앓던 일이 사라졌지만, 이번에 크게 앓게 된 것도 결국 산 때문이다. 작년 여름 내내 우중 산행을 하고도 무탈했던 몸이 고작(?!) 6시간 동안 장맛비 속에 노출되었다고 갑자기 까탈을 부리는 것이 왜일까 곰곰 생각해 보니, 지난번 산행에서 스틱을 잃어버리고 온 인걸이를 기다리느라 30분 정도를 빗속에 서 있었던 것이 결정적인 듯하다. 말로만 듣던 저체온증. “한여름에 얼어 죽는다!”는 산꾼들의 속설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산에서는 보통 표고(標高) 차 100m마다 0.4에서 0.7℃씩 기온이 떨어지고, 젖은 옷은 마른 옷에 비해 열전도율이 240배나 더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의 몸은 산열(産熱)과 방열(放熱)의 균형이 깨지면 체온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체온을 잃으면 감기 몸살뿐 아니라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그래도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픈 만큼 배우는 건 있다. 이번 산행 역시 우중 산행이다. 한때는 나도 비 내리는 날의 우수와 낭만, 고독한 정취를 꽤나 좋아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나이를 먹어 삭막해져서인지 건실한 생활인이 돼서인지 내리는 비가 그리 곱지 않다. 이렇게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뚫고 온종일 산길을 헤쳐가야 하는 일은 더욱 괴롭다. 하지만 지난번의 호된 몸살을 교훈삼아 단단히 준비를 하고 빗속에 나선다.
그나마 이번의 1박 2일 산행은 비교적 평탄한 구간을 지난다. 특히 석병산으로 가는 길은 학창시절 지리 시간에 배웠던 임계 카르스트(karst: 석회암 지역에서 물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특수한 지형으로 땅이 움푹하게 함몰돼 있다) 지역이다. 그런데 고운 꽃이 손을 타고 잘 된 곡식 이삭이 빨리 잘리는 이치인가, 시멘트의 재료가 되는 석회암을 품고 있다는 이유로 자병산은 채광지가 되어 완전히 파헤쳐져 그 모습이 아예 사라져버린 상태다. 아들아이는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자리 그대로 있던 산이 고작 몇 년 만에 그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며 안타까워한다.
‘산’을 주제로 한 ‘낭독의 발견’ 녹화장에서 나는 말석에 끼어 앉은 것만으로도 황공한 울트라 왕초보일 수밖에 없었다. 북한산만 800번 이상을 오른 이성부 시인, ‘한국의 1세대 여성 산악인’ 남난희 선생, 산기슭에 집을 짓고 매일 산을 오르는 기업인 박용기씨 모두가 앞서 백두대간을 완주한 분들이다. 그야말로 산과 삶이 하나인 산사람들과 둘러앉아 산 이야기를 나누노라니 절로 신이 나고 흥겨웠다. 하지만 그들 역시 마냥 산행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고 때로 고통스럽고 외롭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성부 시인의 말대로 ‘아름다움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산에 오른다고.
간혹 인생이 고달프다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백두대간 종주를 권하기도 한다. 그러면 상대는 “산악인도 아닌데 너도, 나도, 아무나 백두대간에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럼 나는 “내게 백두대간이듯이 각자에게 자신만의 백두대간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것을 찾아서 온 마음과 몸을 던져 백두대간을 종주하듯 해 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