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 나누고 행복도 나눕니다”
1994년 박물관 개관 이후 미술관, 조각공원, 종교전시관, 연구실, 벽화 등 차례로 갖춰나가
“여기는 단순한 문화원이 아니에요. 중남미 외교센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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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갑표 중남미문화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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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영 기자
못 견디게 좋아하던 취미 활동, 이것이 공익과 애국으로 진화될 수 있을까. 중남미문화원 홍갑표(78·사진) 이사장과 만나 남미의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속내를 주고받은 두어 시간은 그 가능성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중남미 문화 테마공원은 세계에서 우리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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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중남미문화원에 특별한 해다. 지난 5월 종교전시관과 길이 23m 높이 5m의 세라믹 작품으로 이루어진 마야 상형문자 벽화, 중남미 전반의 역사와 문화예술 관련 국내외 참고서적, 주요 기록과 서류, 수장고 등을 갖춘 연구소를 추가 설치해 명실 공히 세계 유일의 중남미 테마 문화 공간으로 새롭게 확장했기 때문이다. 6월 19일 가진 개관식엔 코스타리카 부통령 내외, 중남미 5개국 대사 부부와 각국 장관, 국내 각계 인사 등 12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이 자리에서 알피오 피바 메센 코스타리카 부통령은 “스페인, 이탈리아 어디를 가도 안팎으로 아름다운 곳은 여기 중남미문화원뿐”이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홍 이사장은 “여기를 단순한 박물관으로 보면 안 돼요. 중남미 외교센터로 봐야지”란 자부심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그는 초대 코스타리카 대사, 도미니카, 아르헨티나, 멕시코 대사 등을 역임하며 중남미 전문 외교관으로 30여 년간 뛰어온 남편 이복형 원장과 함께 부임지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며 중남미 유물을 수집했다. 남편 퇴임 후 이를 토대로 1994년 박물관을 개관하고, 이어서 1996년엔 미술관을, 2001년엔 조각공원을 하나씩 갖추어 나갔다.

“내가 행복해야 남에게 행복을 나누어준다는 생각으로 문화원을 가꾸고 또 가꿔왔어요. 여기 다 보세요. 이 넓은 공간, 수많은 유물, 어느 것 하나 내 것이 없습니다. 모두 재단법인화했고, 그 재단법인에 우리 아들딸은 들어오지도 못하게 아예 못 박아 놓았어요. 부지도 문화시설로 묶어놓아 비싼 땅값 때문에 분쟁날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아들 내외와 미국에서 디자이너로 자리를 잡은 딸이 문화원 운영을 위해 이렇게 저렇게 도움을 주고 있어요.”

그는 우리 사회가 문화를 ‘나눔’보다는 ‘소유’로 은연중 간주하기에 고도의 경제성장 속에 빈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오늘 하루의 고통은 오늘로 족하다는 남미식 사고방식이 자신과 참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남과 견주어 상대적 박탈감이나 빈곤을 별로 느끼지 않고 자족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이런 생각은 그의 개인적 삶의 경험과 아주 밀접하다. 안동부사, 이조판서까지 지낸 정통 유학자인 친할아버지는 관습대로 그 많은 재산을 큰아버지에게 물려주었고, 그 재산은 얼마 안 가 바닥이 났다. 덕분에 개인의 부의 한계를 일찍 깨달았다. “1조원을 가진 거부라도 궁둥이에 그 돈을 그대로 깔고 앉으면 1조원을 가진 거지나 마찬가지”라는 소신이 저절로 생겼다. 장자가 아니었던 그의 아버지는 8남매 중 막내로 50세에 얻은 딸을 공부시키지 않았다. 그의 집안에서 ‘학문’은 남자들의 영역이었다. 공부 열망이 대단했던 그는 13세부터 고학을 했고, 20대엔 없는 돈을 아껴가며 우리나라의 골동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남편 이 원장과는 6·25 당시 18세와 20세 청춘 남녀로 만나 오랜 연애 끝에 24세 때 결혼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서로 계산법도 없었고, 문화적 코드가 잘 맞아떨어진 덕”이었다.

지금의 문화원 터는 30대 중반, 1968년 남파 공작원 김신조 사건으로 북한과 비교적 가까운 고양시 땅값이 형편없이 쌀 때 평당 300여 원에 마련했다.

“일생 서울에 그 흔한 아파트 한 채 마련하지 않았어요. 잠깐씩 전세로만 살았죠. 오로지 40여 년을 이 터에서 뒹굴며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심었어요. 때론 이장 집에서 한 달여를 머물며 작업도 했죠. 후에 주한 외교사절이나 고위직 부인들이 우리가 마련한 농원에 놀러와 컬렉션을 보면서 감탄했어요.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박물관이 하고 싶어졌어요. 이미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기엔 소장품 규모가 너무 커졌고, 후세에 길이 이를 전하고 싶었거든요. 이게 내 인생을 확 바꿔놓았죠.”

“네 마누라 잡아라, 큰일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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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남편은 경희대 박물관장을 하던 친구를 집에 초대해 아내가 박물관을 하고 싶어 한다며 조언을 구했다. 그 친구는 일언지하에 “네 마누라 잡아라, 큰일 난다! 그건 재벌이나 대학에서나 할 일이지”라고 말했지만 부부는 이를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 이사장은 남편을 따라 타국 생활을 하며 매료된 인디오 문화 때문에 “남편을 잉카·마야 문명의 진원지인 멕시코에 꼭 발령을 내주세요” 염원하곤 했다. 그런데 정말 그의 남편은 대사 마지막 부임지로 멕시코 발령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이 막 나 까무러칠 정도였어요. 내가 출국하면서 한 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 아버지, 이제 (박물관) 준비해 올게요’였어요(웃음).”

수십 년에 걸친 열망 끝에 이룬 꿈이지만 그는 말한다. 박물관이야말로 자신 삶의 ‘눈물의 씨앗’이라고. “무엇 하나 계산하지 않고 덤벼들기부터 한 나는 미친 여자예요”란 고백이 말끝에 따라 나온다. 

“야심 차게 미술관을 연 지 얼마 안 돼 1998년 호되게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어요. 그동안 모아놓았던 우리나라 골동품을 다 팔고 남편의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아 몽땅 털어넣은 상태에서 여유분 땅이 팔려 건축비와 운영비를 충당할 것이라 낙관했는데 이게 틀어져 버렸어요. 한 달 이자가 24%가 넘어가는데 공무원 생활만 했던 우리가 무슨 돈을 융통할 수 있었겠어요? 전기요금도 못 내 전시실 불이 꺼지고…동네 목욕탕까지 다급히 달려가 돈을 꿔온 적도 있고 당시 경기도 원당에 있던 한전으로 달려가 사정한 적도 많았어요.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얼마나 펑펑 울었던지.”

이런 마음고생 몸고생 탓에 그는 2000년을 전후해 우울증과 당뇨병, 갑상선 등 오만 가지 병에 걸렸고, 1999년 이미 사후 장기기증 신청까지 해버렸다. 그러곤 “이왕 죽을 바에는 차라리 저 빈터를 채우고나 죽자”란 마음으로 중남미 각국 대사관에 조각 작품을 기증하라는 공문을 날렸다. 대사관들에서 온 답변은 “조각품 기증은 하겠는데 본국에서 한국까지의 운송은 당신네가 책임지라”는 것. 각고의 노력 끝에 남편의 동문인 당시 한진해운 부회장의 도움으로 배를 빌려 각국 조각품을 문화원으로 나르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때 알았어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또 외환위기의 극심한 시련을 통해 깨달았어요.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면 병든다는 것을요. 그러면서 나이 칠십에 알았지 뭐예요. 신은 인간이 감당할 만한 고난을 준다는 것을 말이에요.”

“박물관은 내 삶의 눈물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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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그는 “이제 그만 은퇴하시죠”란 말을 들으면 즉각 반박하곤 한다. “이때 아니면 언제 일해요? 죽으면 영원히 무덤에서 쉴 텐데”라고.

“난 참 행복한 할머니예요. 젊은이들이 점점 많이 찾아와 문화원을 채워가는 것을 보면 같이 젊어지는 것 같고, 여기를 찾는 유치원 아이들에게도 너무 고마워 절이 절로 나오죠. ‘할머니가 너희가 커서 대학 가고 결혼 하는 것 못 봐도, 그래도 날 기억해줄 거지?’ 하면서요. 내 안에 최고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으니 뭐가 부럽겠어요?”

그는 요즘 ‘유언서’를 겸해 일종의 문화원 기록을 쓰고 있다. 모든 세세한 것, 즉 어느 나무에 벌레가 어떻게 먹고 어디를 어떻게 방수하고 등에서부터 그만이 알고 있는 문화원의 내밀한 가치까지 여기에 차곡차곡 담아낼 계획이다. 그리고 기자가 짐작하는 바로는 그의 노트엔 시장에서 마주친 거무스레한 그릇을 집에 가져와 비 오듯 땀을 쏟아내며 닦아낸 후 마주치는 번쩍거리는 은의 황홀함, 남편이 멕시코와 엘살바도르 대사를 겸임하던 시절 게릴라전을 뚫고 숲 속 미국인의 집으로 들어가 유물을 구하고 이를 제대로 포장도 못한 채 비행기에 정신없이 올라탔던 추억 등이 함께 녹아들 것이다. 이런 지독한 열정이야말로 문화를 뿌리내리게 하는 자양분이 아닐까.

“우리 문화원 식구들에게 말하곤 해요. 5500원 내고 들어오는 방문객들이 최소 5만5500원의 행복을 갖고 돌아가시게 하라고요”라는 그의 말을 뒤로 하면서 문화야말로 최고의 마음과 정성을 전하는 선물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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