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잡아먹은 년’ 구박 심해…‘빨갱이’ 유족 오명 벗기 위해 첩살이도 감행
“수시로 와서 나를 마당에 세워놓고 막대기로 마구 때리고 가곤 했어요”
“친척들은 자신들에게 피해가 돌아올까 싶어 왕래를 끊었지요”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며 슬퍼하는 가족의 모습.   출처=KWC #728dosage for cialis site cialis prescription dosage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며 슬퍼하는 가족의 모습. 출처=KWC #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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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여름 모심기할 무렵이라 남편은 논에서 일하고 있었어. 어느 날 집으로 누군가 와서 남편을 찾기에 들에 나가셨다고 하니 찾아온 사람이 집 앞의 길목에서 남편을 큰 소리로 불렀어. 그러자 일하던 남편은 집에 와서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더라. 내가 남편에게 ‘누가 부르노?’ 하니 ‘경찰서에서 오라는데 가보지, 뭐’ 하고 나갔어. 그런데 그 길로 지서 창고에 갇힌 채 돌아오지 않기에 매일 밥을 싸들고 가서 언제쯤 풀려나나 기다렸지. 며칠 뒤 밥을 들고 지서 창고에 가니 창고가 텅 빈 거라. 그 부근에 살던 사람들이, 갇혀 있던 사람들이 새벽에 ‘나 죽으러 간다’고 소리를 지르며 트럭에 실려 골짜기 쪽으로 갔다는 거여. 그 말을 듣고 그쪽으로 뛰어갔는데 중간쯤 다다르니 벌써 총소리가 나더라고. 그날은 무서워서 사건 현장에 못 가고 2~3일 뒤에 가보니, 여름이라 시신들이 벌써 부패되어 아무 모양도 없고 형편없더라. 그 뒤 나는 남편의 시신을 찾을 겨를도 없이 갓난아기를 업고 걸음마 하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피란을 나갔어.”

필자가 예전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에 근무하면서 만난 한 할머니의 이야기다. 2005년에 출범한 진실위에서는 2010년까지 국민보도연맹사건과 같이 한국전쟁 전후에 군경에 의해 불법적으로 살해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사건을 조사하고 진상 규명을 했으며, 그 과정에 필자는 이와 같은 피해자 가족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이 할머니처럼 날벼락을 맞은 듯 하루아침에 갑자기 남편을 잃은 뒤 혹독한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입 한 번 벙긋 못 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온 ‘과부’들이 많았다.

현재 대부분 80대 이상의 고령인 이 할머니들이 필자를 만났을 때 가장 많이 하소연한 것은 남편을 잃은 뒤 닥쳤던 생활고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 생계 부양자로 살았던 고단한 삶에 대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군경 아내들과 달리 국가가 시행하는 복지정책의 혜택조차 받지 못해 그 상태가 더 심각했다.

“남편 죽은 일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어. 먹을 것은 없는데 일할 사람도 없고. 그래서 농사일 하고 남의 집 일도 하고, 나 혼자 시부모와 자식 4남매 여섯 식구 부양하느라 손가락이 휘어지도록 고생했지. 내가 고생한 것은 하늘만 알지, 아무도 몰라.”

‘한국전쟁 미망인들에 대한 이임하의 연구(2000)’에 소개된 자료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60년 사이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 중 75% 이상이 생활 정도가 ‘하’에 속한 것으로 조사돼 있다. 그리고 약 80%가 국졸 미만의 학력을 가졌고 특히 45% 정도는 학교를 전혀 다닌 적이 없는 문맹자들이었다.(보건사회통계연보, 보건사회부, 1962) 즉 이들은 대다수가 빈곤 상태에 있었으며, 집안의 가부장제적 사고 때문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빈곤을 벗어날 수 있는 기술이나 지식, 사회 경험이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이 여성들이 전쟁으로 가계 부양자가 됐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생계수단은 한정돼 있었다. 농촌지역에 살던 여성들은 남편이 죽은 후 가장이 되면서 일반 농촌 여성들보다 더욱 강도 높은 노동을 해야만 했다. 특히 좌익 관련 사건으로 남편이 죽은 경우에는 친족이나 이웃들과 인간관계가 단절된 경우가 많아 여성이 혼자 감당해야 할 노동의 부담이 훨씬  컸고, 물대기와 같이 농촌 공동체에서 남자들끼리 협업으로 진행해오던 여러 농사일에서도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농사지을 땅조차 없던 여성들은 바느질품을 팔거나 식모살이, 노점상 등 도시 비공식 부문의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더 심한 경우에는 생계를 위해 성매매와 같은 일을 하거나 비자발적인 형태의 재혼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처럼 살아남은 여성들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온갖 희생을 감수하며 혹독한 삶을 살아야 했다.

군경에게 학살당한 민간인 희생자의 부인들이 많이 호소한 또 다른 문제는 사회적 소외와 외로움이다. 좌익 관련 사건 희생자의 아내들은 남편이 죽고 난 뒤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의 감시나 핍박을 당한 경우가 많다. 게다가 가족과 친척, 이웃 등 공동체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어 소외된 삶을 살기도 했다. 빨갱이의 처이므로 다른 가족에게 피해를 줄까봐 시댁에서 노골적으로 쫓겨난 경우도 있었다.

“남편 죽은 뒤로 경찰들이 수시로 와서 나를 마당에 세워놓고 막대기로 마구 때리고 가곤 했어요. 친척들은 자신들에게 피해가 돌아올까 싶어 왕래를 끊었지요. 시어머니조차 나를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고 구박했어요. 나는 시어머니 살아계신 20년 동안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은 뒷방에서 이불도 없이 잠을 자곤 했어요.” 

이 여성들은 재혼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녀를 부양하고 있던 여성은 두말할 나위 없고, 자녀가 없는 경우에도 전통적으로 여자는 한번 시집가면 영원히 그 집 사람이 돼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재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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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내가 18살에 혼인해 20살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혼인하고도 남편은 제대로 집에 있지 않았기에 남편과는 한 달 재미도 못 봤다. 재혼은…. 당시에는 재혼한 사람은 집안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고, 친정에도 발걸음 할 수 없었기에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도 없이 60년을 살았다. 지금도 자다가 일어나 생각하면 그때 일이 꿈 같고…. 내 몸뚱이가 살아 있는 것이 짐이다. 모진 목숨 이어가고 있지만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이 짐 덩어리를 어떻게 할꼬 한탄한다. 이 마음을 알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스물하나에 결혼하고 3년 만에 그렇게 됐다. 남편 죽을 무렵 딸을 하나 낳았지만 그 아이는 낳은 지 열 달 만에 죽었다. 재혼은, 시집살이가 하도 몸서리가 나서 안 했다. 나 시집살이 한 거 말도 못 한다. 요새 생각하면 재혼을 한번 해봤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지금 후회해봐야 무슨 소용 있겠나. 남편이 군대 가서 전사했으면 (나라에서) 생활비라도 타지만 그것도 저것도 아니고 억울하게 죽었으니 한평생 내 가슴만 터지고. 스물한 살이면 요즘 같으면 결혼도 하지 않았을 나이인데.”

한국전쟁 전후 좌익 관련 여성 유족의 경험에 대해 조사한 이령경의 연구(2003)에 따르면, 이처럼 사회적으로 재혼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한데도 좌익 관련 피해 여성 중에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멍에를 벗기 위해, 또는 농사지을 땅조차 없는 빈곤 때문에, 생존수단의 하나로 남의 집에 첩으로 들어가거나 재혼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재혼을 한 여성들은 대체로 고향을 떠나 과거를 숨기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터에서 전사한 군경의 아내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민간인 희생자의 아내들도 지금은 고령으로 생존자가 그다지 많지 않다. 남편 사망 후 가장으로서 자녀 양육과 생계를 책임지는 노동을 함께 감당했기 때문에 건강이 극히 나쁜 상태에서 단명한 경우가 많고, 현재 생존해 있다 해도 건강 상태가 나쁜 경우가 많다. 보살펴 줄 가족이 없는 생존자의 경우 생활보호 대상자로서 정부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그 돈만으로는 생활이 힘들어 지금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 부업을 하며 살거나, 거동이 불편한 경우 농촌마을에서는 마을 주민들의 보살핌으로 생활하고 있다. 희생자가 대규모로 나왔던 몇몇 농촌마을의 경우에는 한국전쟁 후 마을을 떠날 능력이 있는 유가족들은 타지로 이주하고 지금은 고향을 떠날 힘조차 없는 80~90대 고령의 여성 노인들만 부양가족 없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분단과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60년간 사회와 국가로부터 외면당한 채 살아온 이 여성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일반적으로 전쟁미망인이라고 하면 한국전쟁 당시 전쟁터에서 전사한 군경 미망인과 군경에게 학살당한 민간인 희생자의 미망인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후자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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