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재 - 두타산(1353m) - 청옥산(1403m) - 고적대 - 상월산 - 백복령(강원 삼척-정선 임계)
1박 2일, 총 30㎞, 17시간 소요
“마지막 서너 시간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내려왔어. 나중엔 발이 너무 아파서 등산화와 양말까지 벗고 맨발로 산길을 걸었지. 두타-청옥 이후론 장거리 산행은 포기했어.”
등산을 취미로 가지고 십여 년간 꾸준히 산을 타온 소설가 홍양순 언니의 고백.
“2기에서 백두를 시작했다가 중도에 포기한 구간이 바로 두타-청옥이에요. 두타산에서 무릎이 완전히 ‘맛이 가서’ 결국 무릉계곡으로 탈출했죠. 결과적으론 무릉계곡 내려가는 것이나 그냥 진행하는 것이나 거리와 시간이 같은 셈이었지만.”
2기에서 중도 하차했다 4년 만에 다시 백두대간 종주에 도전한 지혜 엄마의 증언.
귀가 얇은 나는 주위의 이런 위험한 고백과 무서운 증언에 남몰래 가슴을 콩닥거리며 ‘두타-청옥’을 기다려왔다. 두려운 건 두려운 거고 어쨌거나 궁금했다. 대체 어떤 산이기에 나름 산 좀 탄다는 뜨르르한 산꾼들을 연거푸 낙마시켰을까?
그리고 ‘두타-청옥’이 과연 진정한 ‘무릎 타격 구간’인가와 더불어 산행을 하며 직접 확인할 것들이 두 가지 더 있었다. 그중 하나는 두타산과 청옥산 중 어떤 것이 바위나 돌로 이루어진 골산(骨山: 바위산 또는 암산)이며 어떤 것이 주로 흙으로 이루어진 육산(陸山: 흙산 또는 토산)인가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두타산이 육산이고 현재 최고봉인 청옥산이 골산이라고 하는데, ‘산경표’에서는 태백산을 향해 남하하는 백두대간 위의 산을 백봉령→두타산→청옥산→죽현(竹峴:댓재)의 순서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의 두타가 지금의 청옥이고 지금의 두타가 옛날의 청옥으로 짐작된다. 그런데다 ‘두타’라는 이름이 주는 왠지 둔탁한 이미지와 ‘청옥’이라는 섬세한 이미지가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다. 흙이냐 돌이냐, 두타냐 청옥이냐? 새벽에 집을 나설 때부터 아들아이와 실랑이에 가까운 토론을 벌이다가 임시 휴전을 선포했다.
“직접 가서 확인하자!”
이름의 이미지가 둔탁하다 어쩌다 입방정을 떨었지만 실제로 두타와 청옥은 그 말뜻이 매우 아름답다. 두타(頭陀)는 산스크리트어 ‘Dhuta’의 음역으로 ‘버리다, 비우다, 씻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에, 무릇 두타행(行)이라 하면 ‘세속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를 닦는 수행’을 뜻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아무 말 없이 연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을 때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제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그 뜻을 깨닫고 활짝 웃었던 가섭존자, 그의 별칭이 바로‘두타제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청옥은 금, 은, 수정, 붉은 진주, 마노, 호박과 함께 ‘아미타경’에 나오는 극락의 일곱 가지 보물 중 하나로 ‘사파이어’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푸르고 투명하며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단단한 사파이어는 9월의 탄생석이며 불변, 성실, 덕망 등을 나타낸다. 몸에 지니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속설에 혹해 몇 번인가 살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못 산 나의 탄생석이 바로 사파이어, 청옥이다. 여전히 보석을 좋아할 줄 모르는 순진한 척 무지한 나지만 그래도 청옥이 상징하는 뜻만은 탐난다. 변하지 않고, 정성스럽고 참되며, 어질고 너그러운 푸른빛. 그러고 보면 두타산과 청옥산이 3.7㎞ 간격으로 사이좋게 어깨를 겯고 있는 모양이 잘 어울린다. 진정한 보물은 버리고 비워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찰나의 반짝임이기에.
길을 떠나기 전에 품었던 세 가지 의문은 길을 걷는 동안 저절로 풀렸다. 두타-청옥은 겁을 집어먹을 만큼 엄청난 ‘무릎 타격 구간’은 아니었다. 돌사닥다리와 너덜이 많지만 무릎 보호대를 단단히 조이고 내리막에서 스틱을 활용해 걸으니 어지간히 견딜 만했다. 가파른 기울기와 낭떠러지가 만만찮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림 속의 뾰족뾰족한 바늘산 같은 건 없었다. 고적대 300m 정도 앞두고 바위가 등장하기 시작해 200m 전부터 암릉 구간이 이어지지만 기어오르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헷갈리던 골산과 육산의 구분은 결국 두타산이 육산이요 청옥산이 골산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흙산이라고 모조리 흙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고 바위산이라고 몽땅 바위가 아닌 바에야 골산·육산의 구분도 부질없다. 결론인즉슨, 두타산은 두타산이고 청옥산은 청옥산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삶은 그저 그 자체가 목표이자 의미인 삶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