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서울에서 세계여성지도자회의를 개최하면서 서울시는 환영 만찬 장소를 어디로 할 것인지 고민했다. 전 세계에서 지도자급 여성들이 오는 만큼 한국의 멋, 서울의 밤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야외 공간으로 고궁을 물색하다가 최종적으로 경복궁이 선정됐다.

당시만 해도 경복궁에서 그것도 밤에 연회가 열린 적은 거의 없었다. 문화재청과 어렵게 협의해 경회루 앞 잔디밭을 사용하기로 했다. 만찬 메뉴는 한정식으로 정했다. 한식은 손이 많이 가는 편이라 야외 연회에서 대량으로 제공된 적이 없다고 했지만 시도하기로 했다. 밤길 안내는 청사초롱으로 밝히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날씨였다. 일기예보는 그날 오후 늦게 비가 내릴 거라는 것이었다. 시장에게 미리 보고드리고 아쉽지만 H호텔에서 실내 행사로 치르기로 정했다. 그러나 환영 만찬이 예정된 5월 27일 당일 아침부터 외국 여성들은 비가 내려도 좋으니 한국에서 고궁의 밤을 즐기고 싶다는 메시지를 시시각각 시장에게 보냈다. 당일 오전 시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하늘을 보니 비가 올 것 같지가 않으니 경복궁 만찬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경복궁 연회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불안했다. 기상청 예보국장과 직접 통화했더니 비 올 확률이 60%라고 했다. 야외행사는 무리라고 했다. 시장에게 전화를 드렸다. 비가 올 것이 거의 확실하니 실내 행사로 돌리겠다고 건의했다. 건의가 받아들여져 실내 행사로 준비하고 있는데 다시 시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시 경복궁 행사로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그때가 오후 2시를 넘고 있었으니 이제는 시간적·물리적으로 더 이상 바꿀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또다시 물량을 경복궁으로 이동해 테이블 세팅과 음식 준비, 문화행사 등을 간신히 마쳤다. 오후 5시 30분에 L호텔에서 열리는 개막식 직후 경복궁으로 이동하면 되었다. 차량도 버스 20대를 대기시켜 놓았다.

아뿔싸. 드디어 일은 터지고 말았다. 개막식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 경복궁 현장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해 점차 빗발이 굵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내 행사로 돌리기는 불가능하니 그대로 강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단상의 시장에게 급히 보고했다. 어쩔 수 없었다. 애써 준비한 경복궁의 밤은 그렇게 빗속에서 맞았다. 부랴부랴 우비와 우산을 동원했지만 비를 온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외국 참가자들은 경복궁의 밤을 즐겼으니 고마울 수밖에. 비 내리는 경복궁의 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고 환호했다.

비를 맞으며 경회루 앞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한복 패션쇼가 진행됐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무대에 올라 “왕궁에 와 있으니 여러분들이야말로 여왕이요, 세계의 여왕”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테이블에 앉아 한정식을 먹는 대신 비를 피해 들어선 회랑에서 다들 선 채로 현장에서 급조한 비빔밥을 나눠 먹으며 근정전을 바라보니 경복궁의 밤은 더욱 빛났다. 이날 참석한 외국의 여성 지도자들은 두고두고 서울의 밤을 추억으로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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