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11시간 30분 소요
아이들의 재량 방학 때문에 3주 만에 가는 산행이 24㎞의 무서운 거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두려움보다 기대와 설렘이 앞섰던 것은 목적지가 바로 태백산이었기 때문이다. 태백(太白)을 우리말로 하면 한밝, 크고 밝다는 뜻이다. 한국 문헌으로는 최초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기이편에 나타난 백두산의 이름이 태백산(太伯山)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태백산은 애초 고유명사가 아니라 이름난 큰 산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靈山)은 영산(永山)이다! 그저 제 모습으로 존재할 뿐인 무엇이 신령스럽다는 것은 그것의 영원성 때문이다. 영원…. 시간을 초월해 변함없이 존재하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자욱해진다. 영원한 가치, 영원한 진리, 영원한 맹세, 영원한 사랑과 우정…. 그토록 아득하고 신비한 영원불멸!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 무릇 그러하듯, 속도를 높여 휙휙 쌩쌩 삶을 스쳐 지나는 유한한 인간에게 산은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한 영원이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산처럼 살고 싶다, 산을 닮고 싶다고 말할지언정 산을 질투하거나 시기하지 않는다. 언제나 변치 않고 그곳에 머무르기에 급속도로 변하는 세상과 삶에 멀미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산을 그리워하며 흠모한다.
하지만 산을 사랑한다는 것이 꼭 ‘등산’을 좋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꼭 1년 전 이맘때만 해도 나는 등산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산을 사랑하지 않는 줄만 알았다. 심지어 ‘산을 싫어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산행 에세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펴낸 후 만난 몇몇 독자들 역시 “저는 원래 산을 싫어해요!”라고 조금은 변명처럼 조금은 항변처럼 말했다. 그런데 그들이 산을 ‘싫어하게’ 된 까닭을 가만히 살펴보면 산에 대한 좋고 싫음을 말하기 이전에 ‘등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원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얼마나 유한한가를 깨닫는 일에서부터, 지혜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닫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태백산은 가슴 벅차게 아름다웠다. 그것은 우리의 태백산행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날씨 속에 펼쳐진 덕택이었다. 지난번 소백산의 괴로운 우중 산행에 대한 보상이기라도 한 듯 춥지도 덥지도 비바람이 치지도 않았다. ‘철쭉제’는 다음 주로 예정돼 있지만 그 바람에 산기슭에 활짝 핀 꽃과 산마루에 아직 덜 핀 봉오리를 동시에 볼 수 있어 더 좋았다. 보통 태백산만을 오르는 등산객들은 석탄박물관이나 유일사, 백단사에서 올라오는 왕복 5시간 안팎의 코스를 이용하기에, 우리는 인파를 피해 지난 25차 산행에서 깊은 눈밭에서 러셀을 하다 포기하고 내려온 화방재를 출발해 역주행으로 정상에 올랐다. 그 덕분에 장군봉으로 가는 길목에서 겹겹산이 불덩이를 토해내는 듯한 일출을 보았고, 신성한 천제단 옆에서 아침밥을 먹는 은혜까지 입었다.
태백산 천제단은 상단인 장군단과 중단인 천왕단과 하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시대부터 하늘에 제를 지낸 장소로 알려진 천제단은 한눈에 보기에도 영적인 기운으로 충만했다. 신령과 신비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한낱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그 구조물이 견뎌온 수천 년의 세월, 돌 하나하나가 들었던 사람들의 수많은 소원을 생각하면 절로 숙연해진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의 절실한 마음이 기적을 일으키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현실이 괴롭고 삶이 고달플수록 간절한 희망으로 마음의 의지처를 찾았다. 이른 새벽에 길은 우물물 한 그릇, 오래 묵은 나무와 잘생긴 바위에서도 그들은 거룩한 신령을 보았다. 내가 뻣뻣하게 마른 김밥과 식어서 풍미가 사라져버린 닭튀김을 씹는 동안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끊임없이 기도문을 중얼거리던 아줌마와 아저씨도 그런 소박한 신앙의 계승자일 것이다.
거의 숨이 깔딱 넘어갈 지경으로 가파른 오르막을 기어올라 신선봉에 다다르니 무덤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에 지나온 하단(下段) 옆에도 자그마한 봉분이 하나 있더니, 이 강파른 신선봉 정상 옆에도 경주 손씨 어느 처사의 묘소가 있다. 명당이라면 기가 막힌 명당이겠지만, 아비의 시신을 떠메고 이 꼭대기까지 기어올라왔을 자식을 생각하면 또 다른 이유로 기가 막힌다. 내친 김에 함께 가던 아들에게 유언을 한다.
“엄마가 죽으면 조문 오는 사람들에게 좋은 술을 종류별로 준비해서 넉넉히 대접해라. 문인들은 각별히 잘 모시고, 장례 절차는 특정한 종교의식을 따르지 말고 전통 방식으로 치러라.”
며칠 전 다녀온 선배의 장례식이 낯선 종교의식에 술마저 없이 치러져 맥맥했던 것을 생각하며 뜬금없는 유언을 하노라니 아들 녀석이 삐죽거리며 대꾸한다.
“아무리 그렇게 유언을 하고 죽어도 장례는 살아남은 사람들 마음대로 치른다며?!”
맥없는 웃음이 픽 터진다. 이제 고작 더딘 걸음마로 삶을 향해 내딛는 아이에게 엄마의 ‘과속 스캔들’이 통할리 없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주인공인 주목(朱木)이 백 년도 못 살면서 아옹다옹하는 우리를 비웃는 듯하다. 하지만 부재(不在)야말로 존재의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역설이 있지 않은가? 유한을 알면 영원을 꿈꿀 수 있다. 어리석음을 인정하면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그러하기에 시간과 속도, 나이에 속을 필요 없다. 삶은 다만 지금, 여기에 있는 이 순간뿐이다. 순간 속에 영원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