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통장인 쌀집 아저씨의 행복

오랜만에 빗물이 섞인 밥을 먹었다. 오랜만에 들쓴 비옷 속에서는 지난 계절의 쿰쿰한 냄새가 났다. 오랜만에 온몸이 젖어 장갑을 벗어 짜니 땟국물이 흘렀다. 맑은 날이었다면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을 비로봉과 국망봉 사이의 툭 터진 길을 이를 악물고 묵묵히 걸었다. 우중 산행은 괴롭고 외롭다. 어쨌거나 결코 즐겁지 않다. 지난 여름 내내 폭우를 뚫고 산행을 해야 했던 악몽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고통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오랜만에 어금니 사이에서 으드득 소리와 함께 대상도 없는 욕이 새어나오려는 순간…. 일어난 대반전을 중2 주원이의 산행기 한 대목으로 대신한다.

아름다운 단편 ‘빗소리’를 쓴 소설가 이청해 선생은 3년째 명리학(命理學)을 공부하고 계신다. 명리학은 한 사람의 사주, 곧 생년월일시의 분석에 의거해 일생의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일명 사주학이다. 사주쟁이와는 상관없는 소설가인 선생이 뜬금없이 명리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이성과 과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내밀한 이치를 엿보고 싶어서라고 한다. 어쨌거나 선생은 가끔 그간의 공부를 복습하듯 복채도 받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사주를 봐주신다. 물론, 나도 봤다(내용은 천기누설이니 말하지 않겠다). 그런데 주어진 내 삶과 운명에 크게 낙담하거나 회의하지도, 기대하거나 의지하지도 않기에 사주든 신점이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에 바쁜 내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선생이 해준 ‘진짜 좋은 사주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였다. 선생은 특유의 야무진 표정으로 입매를 살짝 비틀며 말했다.

“진짜 좋은 사주를 가진 사람은 우리 동네 통장인 쌀집 아저씨야!”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하여 눈을 껌벅이노라니 선생이 ‘쌀집 아저씨’의 신상을 설명한다.

“환갑날 자식들이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여는데, 자식들 중에 빠진 놈 하나 없고 다들 살림살이가 고만고만하니 흉도 샘도 낼 게 없고, 동네 사람들 부조라고 만 원 이만 원 들고 와 다들 술 한 잔에 거나하게 취해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그렇게 아무 것도 특별할 것 없이 오로지 평범한 우리 동네 통장인 쌀집 아저씨의 사주가 재벌이나 대통령의 사주보다 더 좋다니까! 명문대학 나오고 자기 이름 걸고 사는 사람들, 사주로는 엉망이야!”

사주가 엉망일 수밖에 없는 증거를 골고루 갖춘 나는 멍하니 사주 좋은 ‘쌀집 아저씨’의 잔칫날을 상상했다.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넘치는, 고뇌도 번민도 교활한 이전투구도 없는 순진무구한 먹자판! 하지만 고단한 삶의 악천후 속에 요철 많은 돌너덜을 지나본 사람은 안다. 그 평범함이야말로 얼마나 특별한 것인가?

고작 발가락 세 개의 문제일 뿐이었다. 하지만 산길을 걷는 내내 내 신경은 온통 그것들에 쏠려 있었다. 그것들만 아프고 쓰리지 않는다면 살 것 같았다. 펄펄 날아서 단숨에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았다.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그처럼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는 사소하고도 엄연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렇다. 그처럼 행복은 생존 조건이며 고차원적 가치며 개인적 특성을 모두 따져 계산하는 복잡한 수식의 몫이라기보다, ‘우리 동네 통장인 쌀집 아저씨’의 단순하고도 소박한 잔치에 더 가깝다. 사람들은 대개 네 잎 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이라는 사실에 몰두해 그것을 찾으려 풀숲을 뒤지지만, 그보다 한 잎이 더 적은 평범한 세 잎 클로버가 행복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신현림의 시구처럼 행복하리라고 믿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손끝에서 백 개의 태양이 숨 쉬고, 백 개의 연꽃이 분분히 피어나리라는 것을.